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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 포천현감 토정 이지함의 애민정신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2년 06월 18일
↑↑ 이희용 칼럼니스트, 포천신문 자문위원
ⓒ (주)포천신문사
토정 이지함 선생의 본관은 한산이고 고려 말 삼은에 한 분이시고, 고려를 통 털어서 손꼽히는 학자요 재상이었던 목은 이색이 토정의 6대조 이다. 장형은 인종 때 ‘백의정승’이라는 칭호를 들었던 이지번이고 , 토정의 제자는 조카이며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와 이조판서지낸 이산보 등이 있다.

토정은 나이어려서 부친을 잃고 형인 이지번의 보살핌과 학문을 배웠고,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당시 조정과 사회풍조가 너무나도 썩었기에 벼슬하기 위해 과거를 보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며 뛰어난 인품과 학문을 갖춘 선비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또한 토정은 평소에 구리로 된 갓을 쓰고 다녔는데, 머리에 쓰고 다니다가 목마를 땐 물 떠먹고, 배고플 땐 밥 짓는 솥으로도 쓰고, 세수할 땐 대야로 썼다고 한다. 이렇게 실용주의적인 인품으로 거추장스러운 체면 따윈 벗어던졌다.

그는 천문, 지리, 산수, 술서 등 제가잡술까지 통달했으나, 평생 벼슬엔 뜻이 없기에 산천유람과 제자 기르기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토정이 부패한 명종시대가 가고 선조의 등극으로 정국이 바뀌어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등장하던 선조6년(1573) 5월에 선조의 명에 의하여 뛰어난 행실이 있는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에 의해 탁행지사를 추천하게 했는데, 여기에 발탁된 다섯 명의 인물들을 ‘오현사(五賢士)’라고 했으며, 첫 벼슬로는 파격적 직위인 6품직을 제수 받았다.

이러한 천거는 토정의 학식과 인품이 당대 최고였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실록에는 해변에 어버이를 장사지냈는데 조수가 점점 다가오니 언젠가는 무덤이 잠길 것을 염려해서 돌로 제방을 쌓았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나 포기하지 않았으며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하늘에 달렸으나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위해 재난을 막는 계획은 게을리 할 수 없다.”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요즘으로 말하면 민의에 의해 특별 천거된 토정 이지함은 56세에 늙은 나이에 첫 발령지로 포천 현감을 제수 받는다. 그는 낡은 베옷에 짚신 차림으로 부임했는데, 관속이 음식상을 차려오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먹을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관리들은 포천고을은 변변한 토산물이 없어 죄송합니다. 다시 차려 올리겠다고 하여 재차 진수성찬을 준비하자 ‘나는 잡곡밥에 나물반찬 하나면 족하노라’ 했다고 그의 문집인 ‘토정유고’(土亭遺稿)에 기록하고 있다.

특히 토정이 포천현감에 재직 당시에 진정으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딱하게 여겨 애절한 마음을 쓸어 담으며 정성으로 적어올린「이포천시상소(莅抱川時上疏)」에는 포천의 실상과 이에 대한 타개책을 보고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포천현의 상황은 이를테면 어미 없는 고아비렁뱅이가 오장이 병들어서 온 몸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 (抱川之爲縣者。如無母寒乞兒。五臟病而一身瘁。膏血盡而皮膚枯。其爲死也。非早卽夕。)”라고 하여 당시 포천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절박하고 곤궁한 처지였는지를 호소하면서, “전라도 만경현에 버려져 있는 양초주와 황해도 초도정을 포천에 비지(飛地)로 소속시켜 주면, 고기 잡는 일과 소금 굽는 일을 일으켜 수년 내 수천 석 곡식을 얻어 백성구제에 힘쓸 것입니다.”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건의가 묵살되는 바람에 토정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아 결국은 벼슬마저 버리게 되었는데 실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선조 7년1574 갑술 8월 1일(임인) 포천현감(抱川縣監) 이지함(李之菡)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함은 원으로 있으면서 스스로의 처신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 고을이 빈약하여 곡식이 모자라자 조정에 건백하여 바닷가 마을의 통발을 자신의 녹봉대신 받아 곡식을 사서 빈약한 재정을 보충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이 따라주지 않았다. 지함은 본디 고을 원으로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곧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돌아갔다.”

그렇지만 토정의 건의를 받아주지 않았던 조정에서는 그가 관직에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과, 병을 핑계했다고 적고 있지만, 토정이 평소 '내게 일백 리 되는 고을을 맡긴다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던 것으로 볼 때, 진정으로 딱한 백성을 위해 온몸으로 선정을 실천하던 토정의 마음과 이를 윤허하지 않았던 조정사이에 얼마나 큰 감정의 공간이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민초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하여 마음으로 담아 올린 건의가 뜻대로 받아들이지 앉자, 토정은 그 답답함이 병이 되었으며 이미 450년 전에 백성들의 헐벗은 삶을 온몸으로 함께하면서 그들의 가난을 없애 주고자 자신의 녹봉마저 털었고, “재물도 글 못지않게 중요하다. 재물을 업신여기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노라”고 하며 살기 위해서는 재물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이런 토정의 애민사상은 맹자의 사상에 근원을 두었다고 하며, 투철한 실천사상은 뒤에 박제가의 실학정신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토정선생이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식같이 사랑했던 포천의 백성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깊은 애민의 마음으로 자신의 사재를 털어 주민의 피곤한 삶을 타개코자 몸을 던지려는 정치인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영달과 임기를 연장하려고 편법을 일삼기도 하고 결국에는 법의 도마 위에 스스로 올라가 주변 사람들을 더 피곤하게 만들기도 하고, 지역의 명예마저 실추시키는 모습을 우리는 흔하게 목격해 왔다.

그러니 우리지역에서 주민의 선택으로 자리에 오른 대표들이, 출사를 극구 사양하다 학문과 실천행동이 뛰어난 재야선비 중에 오현사에 발탁되어 포천현감을 역임했던 토정 이지함 선생의 고귀한 정신을 본받아, 사리사욕에 휘말리지 말고 진정한 애민과 애향 그리고 애국이 무엇인지를 실천으로 보여줄 때를 학수고대 기다려 본다.

이희용 /
대진대학교 동양철학 박사과정, 시인, 연극연출가, 제3대 포천시예총회장, 광릉숲생태문학회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감사,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수능시험장유치추진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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