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省察)이란 말은 많이 들어보았어도 개전(改悛)이란 말은 많이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성찰이란 자신이 한 일을 돌이켜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아울러 반성(反省)하는 것이다. 자기의 언행이나 생각 따위의 잘잘못이나 옳고 그름을 깨닫기 위해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것이다. 내면(內面)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개전에서의 改는 ‘몸’이라는 뜻의 ‘己’와 ‘치다’라는 뜻의 ‘복(攵)’의 합자로 잘못된 행실을 바로 잡기 위해 몸을 친다는 데서 ‘고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改는 개혁(改革)이나 개각(改閣)에서 보는 것처럼 주로 눈에 드러나는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悛은 ‘마음’이라는 뜻의 ‘심(忄)’과 ‘뛰어나다’라는 뜻의 ‘준(俊)’의 생략형인 ‘준(夋)’의 합자어이다. 悛은 ‘마음을 고쳐먹는 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는 의미이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마음을 바르게 고쳐먹기란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옛말에 ‘잘못하였어도 고치면 선한 것이 이보다 큰 것은 없다’라고 하였다. 잘못을 알고 고칠 수만 있다면 바로 성인(聖人)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孔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나 자신이다. 두 사람이 나의 스승인 셈이다. 스승이란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다. 공자의 논리대로라면 두 사람 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두 사람의 행실을 보고 그 잘한 것은 좇아서 배우고 잘하지 못한 것은 경계(警戒)하여 나 자신을 반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전의 정(情)’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거울삼아 본받을 만한 것을 귀감(龜鑑)이라 한다. 그리고 본이 되지 않는 남의 말이나 행동이 자신의 인격수양(人格修養)에 도움을 주는 경우를 반면교사(反面敎師)라 한다. 우리는 개전과 성찰을 통해 귀감과 반면교사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남을 탓할 일이 아니다. 자신을 먼저 되돌아봐야 한다. 따지고 보면 원인제공(原因提供)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나의 언행(言行)이 상대의 거울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쏙 빼놓고 상대만 나무란다. 상대만 쳐다본다. 그래서 남을 탓하게 되고 다툼이 일게 된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한 일을 반성하고 지난날을 되돌아봐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정의(正義)롭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것인가? 정의에서 正은 一과 止의 합자로 一은 적국(敵國)의 성(城)을, 止는 사람의 발 모양을 본뜬 글자로 아군의 발걸음을 나타낸다. 즉 적국의 성을 향해 정벌(征伐)하러 가는 아군의 발걸음이라는 데서 ‘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전쟁을 시작하는 쪽은 자신은 항상 바르고 상대국은 바르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이러한 이유로 正에서 ‘바르다’라는 뜻이 나왔고 ‘가다’라는 뜻인 척(彳)을 붙여 ‘치다’라는 뜻의 정(征)을 다시 만들었다. 義는 양(羊)과 ‘나’ 또는 ‘우리’의 뜻인 아(我)의 합자로 나 또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양처럼 착하다는 데서 ‘옳다’의 뜻을 나타낸다. 이처럼 正義는 자신의 기준에서 선약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絶對的)인 개념보다는 상대적(相對的)인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 살 수 없다는 말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와 어울려 살아야 한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독선(獨善)일 수 있다. 타인을 생각하고 다른 나라도 배려(配慮)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의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힘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정의도 허사가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물론 성찰하고 개전해야 한다. 그리고 정의사회(正義社會)를 구현해야 한다. 정의가 지배하는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개전하고 성찰하되 힘을 비축(備蓄)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