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에는 동네에서 내노라하는 개구쟁이였다. 오십 고갯길을 넘은 이 시점에서 다시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래도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마냥 개구쟁이로 뛰어놀기만 하면 되었던 어린 시절 추억에 빙그레 미소를 지어본다. 그런 개구쟁이도 사춘기를 맞아 부끄럼을 타고 철이 좀 난 중학생이 되었다.
특히 여학생 앞에만 가면 홍당무가 되어 여학생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을 정도로 부끄러워했다. 그 사춘기란 병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남녀공학이란 분위기 때문에 사춘기를 잘 넘기게 되었지만,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체육시간 만큼은 평소 성격과 백팔십도 달라졌다. 구기운동은 모두 좋아했고 조금씩 흉내 낼 수 있는 실력은 되었다. 특히, 탁구, 축구를 좋아하였다.
고등학교 때 윤리선생님은 진학상담 중에 나에게 교대를 지망하여 장차 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주셨다. “교사가 좋겠다.” ‘선생님도 나를 잘 모르시는구나.’ 속으로 탐탁하지 않게 생각한 적도 있다. 실은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다. 어릴 때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꿈은 많았지만 모두 다 허망한 꿈이었나 보다. 대학에 실패한 후, 잠시 좌절에 빠져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도전하겠다고 마음을 추스르고 재수를 결심했다. 형님이 계시는 영등포구 Y동에 무작정 상경을 하였는데 당시 형님은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한 지가 몇 년 되지 않아 박봉에 살림살이가 무척 어려웠다. 그래도 부모님은 형이 장남이라고 논 몇 마지기를 팔아 집을 얻어 주는 사랑을 보이셨다. 그때는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 여겼다.
지금에서는 드문 이야기라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당시 아버지란 존재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형님과 형수 그리고 조카들에게 경제적으로 부담 주는 것이 싫어 재수를 접고 귀향하였다. 집안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아버지 어머니 보기도 민망하여 친구 몇 명과 어울려 무주구천동, 해인사, 금오산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때, 우연히 관공서 게시판에서 ‘사관생도 모집’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2년제 단기사관학교였다. 졸업하면 육군소위로 임관하고 초급대학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진로문제로 또 한 번 갈등과 고민을 하다가 사관학교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졸업 연도에 3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이 되었다. 지금의 모교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성장하여 깜짝 놀랐다. 명실상부한 세계 유일의 특수사관학교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낭만을 즐길 때 나는 원칙을 강조하는 특수집단에 소속되어 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젊음을 국가에 다 바쳤다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푸른 제복을 입은 군인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물론 일부 정치군인들에 의해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역사를 후퇴시켰다는 주장은 백번 옳다. 그들 외 대다수 군인은 그들의 본분을 다하며 충실하게 나라를 지키고 있다. 아직껏 근 삼십 년 이상 군복을 입고 있는 동기생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별을 단 동기생을 보면 그냥 존경스럽다. 어떤 조직이든 자신의 역할이 있고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 온 정성을 다하면 된다고 본다.
어디에서나 ‘나’가 주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잘 것 없는 나지만 ‘나’의 존재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군복을 벗어야겠다는 시점이라고 판단이 되어 미련 없이 전역하였다. 직업군인으로서 능력부족이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사회로 돌아와야 하므로 후회는 없었다. 아무 대책 없이 변신한 나는 군복을 벗은 사회초년생 눈에는 일반 사회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사회에 적응하는데 쉽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입맛에 맞는 직업은 어디에도 없다. 자신의 노력에 따라서 직업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믿는다. 전역하고 칠팔 개월의 시간은 나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이력서를 지참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면 한 달이 금방 지나갔고 짧은 기간에 사회의 냉혹함과 매운맛을 톡톡히 보면서 사회란 이렇구나, 눈치를 챘다. 그리하여 입사한 곳이 소규모 무역회사였다. 주로 일본에서 원자재를 수입하여 국내 여러 화학공장에 판매했다. 그때의 5년이란 기간이 나에게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솔직히 무역의 ‘무’ 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밤낮으로 뛰고 배워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이 분야에는 전문가 못지않다’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원자재 관련된 나의 일을 하고 있다. 아직 소규모지만 내가 원했던 무역회사를 20여 년 전에 차렸고 지금까지도 하는 일이 즐겁다. 나는 내 일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대단한 자긍심도 갖고 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데 보람을 느끼고 있다. 나라고 왜, 어려운 일이 없었겠는가, 서랍 속 깊숙이 숨겨 뒀던 낡은 서류봉투를 꺼내 뒤적거리다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가 눈에 띈다.
1997년 1월경 매스컴에 떠들썩했던 전국적인 대형사기에 휘말려서 그 피해자가 되었다. ‘탄원서’는 사기꾼을 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전체피해액만 하더라도 수백억 원이 되었다. 사기꾼들은 건설장비, 비료, 가구, 모피, 농기구 등 비행기만 빼고 다 사기를 쳐서 피해자들을 분노케 했고 좌절을 안겨주었다. 나는 여기에 스테인리스 스틸 후판(SUS 316L Plate)을 몇 차례 납품하고 물품대금으로 받아놓은 약속어음이 부도처리 되어 수억 수천만 원의 피해를 봤었다. 이 금액은 나에게는 무척 큰돈이었다. 거의 맨주먹으로 시작한 나의 처지에서는 너무나도 엄청난 좌절과 충격이었다. 이 빚을 갚는데 수년이 걸렸다. “비싼 수업료 내고 정말 많은 사회 공부를 했다.”고 말하지만,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어떤 일이든지 체험과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값진 교훈을 얻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악몽을 돌아보면 그때 좌절하지 않고 일어선 것에 대해 나 자신에게 늘 감사하고 있다. 그때 나를 포기했더라면 이렇게 글을 쓰지도 못했을뿐더러 아마, 무기력한 낙오자로 인생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한 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좀이 쑤신다. 그래서 글공부를 시작했고 몇 년 전에 문예지의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수필가와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리고 수필집과 시집도 출간했다. 그래서 이러한 나의 삶의 모습을 보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곤 한다. 몇 번의 변신에 놀라워하는 사람도 있다. 즉, 군인에서 사업가로 사업하면서 문인으로 그리고 만학도로,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일에 도전할 것인지, 지금 당장 밝힐 수는 없겠지만 하고 싶은 일이 눈에 보이면 조금도 주저하거나 마다치 않고 새로운 발상에 도전하고 싶다.
살다 보면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날을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세상에 사는 것도 엄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언제 역경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삶에서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할 때는 전혀 문제가 없다. 역경에 처했을 때가 문제다. 역경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물질과 정신의 조화다. 마음의 병이란 말이 있다. 그래서 모든 병의 근원은 속에서 생긴다고 했나 보다. 근원에서 지혜를 찾는다면 소중하고 귀한 말이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다시 한 번 새겨보면 ‘세상사 모든 일은 자기 마음속에 있다.’ 이 경구는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자신이 믿는 철학, 종교, 지식도 중요하지만, 지혜와 진리의 근본은 자신이란 ‘나’에게서 찾아야겠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절대로 남을 사랑할 수 없다.
‘나’라는 존재가치를 존중하면서 부단히 나를 개발하고 가꾸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 이것이 세상사는 멋과 맛이로구나!”라며 감탄할지도 모르는 일, 남과 비교하지 말고 겸손하면서 마음을 잘 다스리면 속에 가득 찬 그릇된 욕심을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