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는 평지에서 캐어 저장한 씨감자는 이듬해에 심으면 탄저병이 심하여 감자의 수확량이 떨어진다고 하십니다. 어른들은 씨감자를 구하기 위하여 큰 산을 넘어 명지산 기슭의 논남동까지 가야한답니다. 고랭지에서 수확하고 저장한 씨감자라야만 병충해가 적기 때문이랍니다. 봄방학을 하였습니다. “얘, 너 내일 애비랑 씨감자 사러 갈래?” 아버지는 곧 4학년이 되는 나에게 처음으로 큰 산을 넘어가는 산행을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네, 아부지! 근데 몇 시에 떠나야 해요?” “응 내일 아침 새벽 여섯 시쯤엔 가야할 게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이가 아닌 남자로 대접해 주시던 첫 순간입니다. 또한 아버지와의 산행이 처음 있는 일이기에 들떠서 간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초저녁, 채 아홉 시가 되기도 전에 불을 끄고 잠을 청했는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얘, 일어 나거라. 감자 사러 가자!” 엄마는 벌써 조반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해발 1189m의 국망봉 줄기인 도성고개를 넘어 씨감자를 사오는 일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아버지랑 영재 아버지와 함께 주먹밥을 싸가지고 씨감자를 사러 따라 나섰습니다. 먼동이 트기 전에 새벽밥을 먹고 나섰지만 큰 산 중턱에 오르니 벌써 숨이 차고 배가 고파왔어요. “배고프지 않니?” 아버지께서 물으십니다. “배고프긴 한데요. 아직 점심때도 안됐잖아요.” “아니, 모른긴 해두 벌써 열두 시가 훨씬 넘었을 게다.” 시계가 없는지라 해만 바라보며 가늠할 뿐입니다. 해는 열시 방향에 있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열두 시가 훨씬 넘었다고 하십니다. “해가 저기 떠 있는데요?” 내가 물으니 아버지께서는 말씀을 이으십니다. “응, 산에서는 해가 중천에 있는 것 같아도 산은 하늘이 좁게 보이므로 해가 금방 넘어간단다.” 산 위에 있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바람에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 마치 산이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여기서 밥 먹고 가자!” 아버지와 영재 아버지께서는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에 군용 더블 백 배낭을 내려놓으십니다. “너 여기가 어디인 줄 아니?” 영재 아버지께서 물으십니다. “잘…” 말 꼬리를 흐리며 되묻는 표정을 짓자 아버지께서 말씀을 이으십니다. “여기가 도성고개란다. 옛날 후 고구려의 도성이 있던 곳이라 그렇게 부르지…. 산정호수가 있는 명성산은 왜 명성산인 줄 아니?" “아니요.” “한문으로 울명 소리성을 써서 명성산인데 옛날 후고구려 시대에 왕건과 궁예의 큰 싸움이 있었단다. 왕건이 산꼭대기에 있는 궁예의 군사에 번번이 패하였지. 어느 날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명성산 아래를 가고 있는데 한 농부가 소를 부려 밭을 갈면서 회초리로 ‘이랴, 이 왕건이 같이 미련한 소야.’ 그러더래.” “그래서요?” 나는 궁굼하여 바짝 다가서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왕건이가 그 농부한테 물어보았지. ‘저 대관절 왜 왕건이 보고 미련하다고 하시오?’ 그러자 농부는 껄걸 웃으면서 ‘아 왕건이가 미련하기 짝이 없지 않소? 이 산을 돌아가면 저 산 꼭대기에 있는 궁예를 쉽게 잡을 수 있는데 바위 아래서 활을 쏘면서 제 군사만 죽이니 원 참…’하며 혀를 끌끌 차더라는 거야.” “그래서요. 아부지…” “ ‘그래서요’는 뭐가 그래서요 야, 농부가 시키는 대로 뒤로 돌아가서 궁예를 쳐서 크게 이겼지. 그래서 궁예가 울고 갔다고 하여 명성산이 된 거야. 성동 검문소에서 일동 쪽으로 오다 보면 파주골이라는 데 있지? 그 파주골은 왜 파주골인 줄 아니?” “몰라요. 왜 그런데요?” “원래 한문으로 패할 敗자 달아날 走자 패주골인데 궁예가 왕건한테 패해서 달아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재미있어요. 아버지…” 엄마는 깨소금에 뭉친 주먹밥을 왈순마 라면봉지에 싸 주셨습니다. 영재 아버지는 보리개떡을 싸가지고 오셨습니다. 반찬도 없이 주먹밥을 먹는 것이 무슨 맛이 있느냐구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맛이 없으려니 했지만 땀을 흘리고 먹어서 그런지 너무나도 맛있네요. 참깨를 볶아 빻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주먹밥이 이렇게도 맛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옛다, 보리개떡 먹으련?” 보리개떡을 넘겨주시는 영재 아버지의 손은 일을 많이 하셔서인지 보리개떡처럼 거칠었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흐르는 물을 떠 마시며 함께 먹는 반미콩(밥이 맛있으라고 넣는 콩을 말하지만 사실은 쌀이 귀한 시절이라 쌀통의 쌀 오래가라고 넣은 콩이다.)이 듬성듬성 박힌 주먹밥과 보리개떡은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주먹밥과 보리개떡으로 점심 끼니를 채우고 또다시 산길을 걷기 시작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