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論理的) 설득이란 말은 들어보았어도 구성적(構成的) 설득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선 설득(persuasion)이란 무엇인가? 이것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설득이란 동의(同意)를 얻는 것이다. 내 의견에 어그리(agree)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설득(說得) 당하는가? 어떤 경우에 어그리하는가? 상대방의 말이나 의견이 타당(妥當)하다고 생각될 때 설득 당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當然)하다고 생각될 때 설득 당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말을 하고 논리정연하게 설법(說法)을 해도 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이론(theory)이라야 받아들인다.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논리라야 받아들인다.
논리적이란 로고스(logos)를 말하는 것이다. 이치(理致)에 맞게 말을 하는 것이다. 법칙(法則)에 어긋나지 않게 말을 하는 것이다. 패러다임(paradigm)과 씬탐(syntagm)이 맞도록 글을 쓰는 것이다. 주어(主語)와 술어(述語)가 일치하도록 글을 쓰는 것이다. 앞뒤가 맞도록 글을 쓰는 것이다. 앞 문장에서 하는 말과 뒷 문장에서 하는 말이 일치되도록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리 되도록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콘씨스탠시(consistency)를 말하는 것이다. 일관성(一貫性)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구변(口辯)이 좋고 언변(言辯)이 좋더라도 그 말에 일관성이 없으면 논리를 벗어나는 것이고 타당성(妥當性)을 벗어나는 것이다.
논리적 설득이란 이처럼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정연(井然)하게 전달하고 상대의 허점(虛點)을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스스로의 입장을 강화(强化)시켜나가는 능력이다. 논리적 설득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말하는 기술(技術)이다. 수사학에서는 이를 ‘설득의 힘(vis persuadendi)’이라 부른다. 궁극적으로는 말로써 상대의 동의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때 설득은 상대방을 수긍(首肯)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성공적인 설득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닌 논리(logos)이다. 그러나 기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사실(fact)을 말하고 진실(truth)을 말하더라도 어눌(語訥)하게 말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반대로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청중을 압도하면서 달변(達辯)을 토하면 사람들은 흔들린다. 말하는 기술에 현혹(眩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둘째는 말을 통해 상대방과 관계를 구성하는 능력이다. 수사학에서는 이를 ‘잘 말하는 지식(bene dicendi scientia)'이라고 한다. 논리적 설득이 말싸움에서 승리(勝利)하는데 그칠 수 있는 것이라면 구성적 설득은 상대방이 자신과 함께 미래를 꿈꾸는 동반자(同伴者)가 되도록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구성적 설득에서는 논리만큼이나 말하는 사람의 태도(ethos)와 듣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pathos)이 중요하다. 때문에 생각은 자유분망(自由奔忙)하게 하되 표현은 절제(節制)해야 한다. 표현을 조심해야 한다. 비록 완전한 일체감(一體感)을 확보할 수는 없어도 말하는 사람을 확보할 수 있는 부분을 확대(擴大)시켜나가야 한다.
특히 정치적 설득은 의견을 교환하는 소통(疏通)과도 다르고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협상(協商)과도 다르다. 정치적 설득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각인(刻印)시키는 공화(共和)의 리더십(leadership)이다. 공화란 공동체(共同體)의 화합(和合)을 말하는 것이다. 구성원(構成員) 전체의 화합을 말하는 것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고, 다 함께 잘 살자는 것이다. 재로썸 께임(zero-sum game)이 아니라 윈윈 께임(win-win game)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성적 설득을 말하는 것이다. 논리적 설득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구성적 설득으로 이어져야 한다. 파괴적(破壞的)인대화가 아니라 창조적(創造的)인 대화로 이어져야 한다.
오늘의 정치 현실을 보면서 우리가 다 함께 성찰(省察)해야 할 명제(命題)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