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마다 텔레비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극 중 일부는 역사의 기록과 다르게 비칠 수 있는 장면도 나오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긍정적이다. 대하드라마란 사실에 입각한 사극이지만,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해서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청자를 의식해서 없는 것도 있었던 것처럼 포장도 한다. 이 드라마는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인 인물을 재조명함으로써 역사를 뒤돌아보고, 나라의 발전과 과거의 잘못된 오류를 반성하고 성찰해봄으로써 서로 타협해야 하는 당위성과 성장 발전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한, 극적 한 인물을 통해 진취적인 남성상을 구현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성품은 흥미롭다.
동서고금의 통해 봐도 역사의 진실성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제기될 것이 뻔하다.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록된다고 색안경을 쓰고 보기도 한다. 역사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오류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눈에 빤히 보이는 역사까지도 왜곡 찬탈하려는 판국에 심지어 흘러간 역사를 등한시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금 중국은 중화시대를 열기 위한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찬탈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 역시 독도 영유권문제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왜곡된 역사는 단호하게 바로잡아야겠지만 바로잡는 데도 힘이 강할 때만이 가능하다. 힘없는 나라는 강대국에 늘 침략당하고 백성은 유린당하고 만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백의민족은 슬픈 역사가 있다. 나라가 어수선하면 외부의 적들은 더 날뛰게 되어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심각한 문제는 내부의 적이다. 단합하지 않으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모두 다 죽는다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한 역사의 교훈이다.
우리 민족은 정말 위대한 민족이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장렬하게 순국으로 나라에 몸 바친 이름들이 있었으니 그 얼마나 뿌듯한가, 북방 오랑캐를 물리친 을지문덕, 강감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대문호 최치원, 퇴계 이황, 문익점, 성군 세종대왕,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홍의장군 곽재우, 안중근 장군 등 거룩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이름이 수없이 스쳐간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한 분이 중봉 조헌 선생이다. 선생은 문무를 겸비한 용기 있는 인물이다. 임금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기주장을 펴는 용기는 감동을 자아낸다.
김포는 거래처가 있어 자주 들리는 곳이다. 한강변 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 듯 김포시가지가 가까이 다가온다. 한강변 도롯가에 설치된 철조망이 꼭 삼팔선 같아 안타깝다. 아, 여기가 중봉 조헌 선생이 태어난 곳임을 알고 선생의 흔적을 떠올려본다. 선생의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후율(後栗). 시호는 문열(文烈). 경기도 김포출생이다. 응지(應祉)의 아들이며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선생은 1592년 임진왜란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그해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는 등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세하여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중 전투력 열세로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에서 분전하다가 모두 장열하게 전사하였다. 이를 금산전투라 일컬어 숭모하게 되었다. 선생은 조선왕조 중기의 문신으로 우리 유학의 도통을 계승한 유학자이며 경제사상가이자 의병장이다.
선생은 올곧은 성품상 바른 소리를 잘해서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572년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으며, 1575년 경기도 통진 현감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에 귀향 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나기도 했으며 1582년 보은 현감으로 나가는 동안,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으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내기도 했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나고 나서는 옥천군 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률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와 명나라를 칠 길을 빌려달라는 주장에 조정 대신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선생은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 벨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생은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선생이 순국한 지 419년이 지난 오늘날, 나라가 어수선하고 어지러울 때일수록 지조를 지킨 선생 같은 우국충정의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다. 보라, 저기 허물어진 금산 벌 위에 선생이 흘린 핏자국 선명하게 남아있다. 도동리, 선생의 ‘신비도’에 새겨놓은 나라 위한 충정은 표충사 ‘솟을대문’에 높게 솟아있다. 그날의 비분한 핏자국을 우리가 깨끗하게 닦아 드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