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한국말을 할 때 존댓말로 인해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당시 머리를 땋아 내리고 있으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 보여도 결혼하지 않은 애들이었고 나이가 어려 보여도 상투를 틀고 갓을 썼으면 결혼한 어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한 번은 선교사가 길을 가다가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어린 아이를 보았습니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교사가 더듬거리며 물었습니다. “당신이 어른입니까? 아니면 네가 애냐?”
월남전이 끝나갈 무렵, 캘리포니아에 사는 브라운의 집에 전쟁에 참전했던 아들이 귀국 즉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어머니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지요. 빨리 오라고,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다며 어머니는 울먹이며 반복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문제가 있어요. 지금 제 옆에는 전투에 참전했던 동료가 한 명 있는데 그 는 고아예요. 돌아갈 집도 없고 혈육도 없어요. 게다가 그는 전투 중 팔과 눈을 하나씩 잃었어요. 어머니 그 친구와 함께 우리 집에서 살 수 있을까요?”
“글쎄다 얘야. 네 마음은 안다만… 며칠 정도는 가능하겠지. 아니 어쩌면 몇 달도… 그러 나 일평생 그럴 순 없지 않겠니? 네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세상에 그런 불구자를 언제까지나 함께 데리고 살 순 없겠지. 괴롭고 무거운 짐이란다.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할 게다.”
아들 브라운은 무겁게 전화를 끊었고 침묵의 며칠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통화했던 어머니 앞으로 한 통의 급전이 날아들었습니다. 호텔 옥상에서 당신 아들이 투신자살했으니 빨리 시체를 인수해 가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 건강하게 통화한 아들의 투신자살이라니…. 어이없어 하며 달려가던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 앞에서 그만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아들 브라운은 팔과 눈이 하나씩 없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껏 내가 던진 수많은 말들이 어디서 어떻게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있을까요? 두려운 일입니다. 남은 시간은 불평을 줄이고 감사를 늘이며, 원망을 줄이고 찬양을 늘이는 훈련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정학진 / 일동감리교회 목사, 시인 wonchun7@chol.com
충남 강경(江景) 출생, 감리교신학대학교. 동대학원 졸업(역사신학 전공), 한양대 국어국문과 박사과정 수료(현대문학 전공), 강원도 양양에 상운수표교회 개척, 육군군종장교(1989~1993년), 화성 원천감리교회 역임, 포천 일동감리교회 담임, 포천지방 감리사, 월간 <창조문예> 동인. 기독교문인협회 회원, 크리스천 신문사 공모 신인문예에 단편소설 <모탕>으로 등단, 국민일보사와 기독교 문예총 주관 1천 만원 고료 <전국 신앙시 공모전> 대상, CTS 기독교TV <4인4색> 특강 강사(14회 연장방송), 저서 <터널을 지나야 별이 보인다>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