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선(口頭禪)과 공염불(空念佛)이란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또 화두(話頭)라는 말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구두선이나 공염불이나 화두라는 말은 모두 절에서 유래한 말이다. 불교와 밀접한 말들이다. 불교에서 참선(參禪)하는 수행자에게 도를 깨치기 위한 실마리가 되는 말을 화두(話頭)라고 한다. 그리고 이 화두를 사용하여 진리(眞理)를 깨닫고자 하는 선(禪)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그런데 참선하는 수행자가 화두에 담겨있는 참뜻은 체득(體得)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크게 깨달은 양 떠들어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처럼 입으로만 수행하는 것을 일러 ‘구두선’이라 하는 것이다.
구두선과 유사한 표현에 공염불이라는 말이 있다. 공염불이란 신심(信心)이 없이 입으로만 외는 헛된 염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실천이나 내용이 따르지 않는 주장이나 말을 이에 비유해 ‘공염불 하지 말라’고 질책(叱責)하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마음이 간다’는 말을 하는가 하면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는 말도 한다. 염불은 하지 않고 먹을 궁리만 하고 있다는 말이다. 정성을 다해 간구(懇求)하지 않고 허망(虛妄)한 생각만 한다는 말이다. 모든 일이 허사(虛事)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말이다. 헛일이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이처럼 구두선에 그쳐서도 안 되고 공염불을 해서도 안 된다.
참선은 돈오(頓悟)의 길을 가는 것이다. 스스로 깨우침의 길을 가는 것이다. 염불은 불경(佛經)을 염송하는 것이다. 불경삼매(佛經三昧)에 드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는 것이다. 돈오란 담박에 깨우치는 것이다. 담박에 깨우쳐 부처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 참선(參禪)이 스스로 돈수(頓修)의 길을 가는 것이라면 염불은 불경을 통해 점수(漸修)의 길을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 말씀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부처의 경지를 가는 것이다.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공덕을 쌓아야 되는 것이고 몸을 불살라야 되는 것이다. 구두선과 공염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삼천배(三千拜)를 하는 것이고 9년 면벽(面壁)을 하는 것이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개혁(改革)이 한창이고 선거공약(選擧公約)이 한창이다. 그런데 그 개혁이 구두선에 그치고 선거공약이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라면 어찌되겠는가? 불신(不信)만 불러 올 뿐이다. 그 말이 아무리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치장되고 능수능란(能手能爛)하게 사태를 둔갑(遁甲)시킨다 해도 진정성이 없으면 공염불이 되고 만다. 구두선이 되고 만다. 그 말에 진실성(眞實性)이 있어야 한다. 일관성(一貫性)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측가능(豫測可能)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예측가능해야 믿음이 간다. 신뢰(信賴)가 간다. 그들 나름대로 진실성이 있고 일관성이 있다 하더라도 예측이 불가능하면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측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교언영색과 상대되는 말로 강의목눌(剛毅木訥)이란 말이 있다. 剛이란 의지가 강해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毅란 기가 강하고 과단성 있는 모습이란 것이다. 木은 나무 그대로처럼 질박(質朴)한 것이고 訥은 말수가 적음을 말하는 것이다. 강의목눌이란 의지가 굳건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질박하고 말수가 적어 믿음이 가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이처럼 교언영색과 강의목눌은 서로 상반되어 구별하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그 분별을 그르치곤 한다. 그래서 ‘행간(行間)의 의미를 살피’라 하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意圖)가 무엇인지 살피라는 것이다. 그 속내가 무엇인지 살피라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구두선에 넘어가서도 안 되고 공염불에 연연해서도 안 된다. 스스로 노력하고 땀 흘려야 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스스로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했다. 공짜를 바라지 말고 스스로 땀흘려 일하고 거두어들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