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쓰는 말에 손실(損失)과 상실(喪失)이라는 말이 있다. 喪失이라는 말에서 喪은 사람이 죽어 없어진다는 데서 사람을 잃는 것이고 失은 손에서 물건이 떨어져 나가 가진 것을 잃는 것이다.
그리고 損失이나 紛失은 물질적인 것을 잃을 때 사용하는 말이고 喪失은 정신적인 것을 잃을 때 쓰는 말이다. 손실과 상실은 이처럼 무엇을 잃어 서운할 때 쓰는 말이다. 그래서 ‘오뉴월 겻불도 쬐다 나면 서운하다’는 속담이 생겨난 것이다.
당장에 대단치 않은 것도 막상 없어진 뒤에는 아쉽다는 말이다. 하물며 소중한 사람과 이별을 하거나 성취했던 일이 한순간에 물거품 되었을 때의 상실감(喪失感)이란 어떠하겠는가?
물론 가치관(價値觀)에 따라 손실을 앞세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실을 앞세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실이 정신적인 것에 방점을 두고 손실이 물질적인 것에 방점을 둔 것이란 관점에서 보면 상실이 상위개념(上位槪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적인 것이 우선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희망(希望)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꿈(dream)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아무리 절망적(絶望的)인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고 희망이 보이면 헤쳐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지옥 같은 아이슈비치(auschwitz) 감옥에서도 끝가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반면 희망을 저버린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역사적인 사실이 말해주는 교훈(敎訓)이다. ‘마지막 잎새’라는 교과서 내용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message)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절망적인 생각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상실감을 떨쳐버려야 하는 이유이다. 고공낙하 훈련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던 바람으로 인해 낙하지점이 빗나가 물위에 떨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때 혹시나 하는 공포감(恐怖感)을 떨쳐버린 병사들은 괜찮으나 그 공포감을 못 이기고 미리 절망하는 병사들은 물에 떨어지기도 전에 절명(絶命)한다고 한다.
절망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상실감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손실은 단기적(短期的)인 것이고 일시적(一時的)인 것이다. 상실은 그게 아니다. 상실은 장기적(長期的)인 것이고 영구적(永久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상실은 단시일에 회복(回復)할 수 있으나 상실은 그렇지 않다.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세대(世代)에서 세대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것이 절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아니 치명적(致命的)일 수도 있다. 손실보다 상실에 방점을 두는 이유이다.
요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금전적 손실(損失)에는 민감하면서도 자아(自我)나 가치관 상실(喪失)에는 무감각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바야흐로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일반 사람들은 그렇다 해도 정치한다는 사람들이나 공직(公職)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국가관(國家觀)이 있어야 하고 사명삼(使命感)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직자로서의 가치관(價値觀)이 있어야 한다.
뇌물(賂物)을 탐(貪)하면서도 뇌물이 아니고 선물이었다고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를 생각해야 한다. 당장 목전의 이익만을 탐해서는 안 된다. 사후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견득사의(見得思義)라는 말이 있다. ‘얻은 것을 보면 옳은가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손실(損失)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실(喪失)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국민이 느끼는 상실감(喪失感)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정치권에선 여야 모두 돈 봉투 사건으로 어수선하다. 그리고 대가성(代價性)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마음이 불편한가?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성현(聖賢)들은 한탄한다. “사람들이 개나 닭을 잃어버리면 찾으려 하나 자기의 마음을 잃고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