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일상생활에서 공정(公正)과 형평(衡平)을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한다. 어떤 처사(處事)를 놓고 ‘공정하지 않다.’ ‘형평성에 어긋난다.’ 이런 말들로 설전(舌戰)을 벌이곤 한다. 공정하다는 것은 어떤 기준에 부합(符合)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A에게는 이런 잣대를 적용하고 B에게는 저런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A나 B에게 똑같은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다. 공정은 이처럼 일반성(一般性)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보편성(普遍性)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바르다’는 것이다.
형평은 ‘기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울대를 놓고 말하는 것이다. 물건을 달 때에 저울대가 수평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저울대가 수평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면 형평(衡平)이 깨지는 것이다. 균일(均一)이 깨지는 것이다. 균일이 깨지고 형평이 무너지면 자연 공정이 무너진다. 일정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招來)하기 때문이다. 공정과 형평은 이처럼 인간사(人間事)에서 양면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그 쓰임은 다르다.
공정은 어떤 일을 할 때에 사전(事前)에 먼저 따지는 것이고 형평은 사후(事後) 나중에 따지는 것이다. 공정은 기준 잣대를 정하는 것이고 형평은 그 결과를 보는 것이다. 물건을 나눌 때에 시종일관(始終一貫) A라는 잣대로 나누었다면 공정한 것이다. 그런데 한쪽은 10을 주고 다른 한쪽은 9을 주었다면 형평에 어긋나는 것이다. A라는 똑 같은 잣대로 나누었더라도 그 나눈 결과가 다르다면 형평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공정은 먼저 따지는 것이고 형평은 나중에 따지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또 공정은 자연이 정하는 섭리(攝理)의 잣대라면 형평은 인간이 정하는 심리(心理)의 잣대라 할 수 있다. 섭리의 잣대란 절대(絶對)의 잣대를 말하는 것이고 심리의 잣대란 상대적(相對的)인 잣대를 말하는 것이다. 공정은 절대의 잣대이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誤差)가 생겨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미 공정의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반면 심리의 잣대는 이리도 할 수 있고 저리도 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심리의 세계는 물리(物理)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의 세계에서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으나 심리의 세계에서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뛰어넘어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양극화(兩極化)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심지어 1%대 99%의 싸움으로 에스컬레이트(escalate) 되기도 한다. 또 정치문제로 비화(飛火)되기도 한다. 양극화 문제는 정치적 이쓔(issue)이기 전에 경제와 사회의 문제다. 그래서 해결책도 시장경제(市場經濟)와 조화를 이루며 사회통합(社會統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푸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공정성(公正性) 확보에 주안점을 둬야지 사회적 형평성(衡平性)까지 강요해서는 안 된다.
경쟁력을 상실(喪失)한 기업들을 살리려고 인위적 규제와 보호장벽을 친다든가, 경제정책을 사회보장정책으로 활용한다든가, 기업 규모에 따라 투자를 제한하고 기업에 과도한 고용책임(雇用責任)을 부과한다든가 한다면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기업의 기운이 약해지면 사회에도 구조조정(構造調整)의 한파가 몰아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평범한 진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 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파이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파이 자체를 깨버려서는 안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파이는 키워야 한다. 파이는 키워가면서 배분(配分)에 신경 써야 한다. 상대적 박탈감(剝奪感)을 갖지 않도록 배분에 힘써야 한다. 그래서 경주 최부자집 사람들이 100리 안팍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한 것이고 전남 구례 운조루 사람들이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나무뒤주를 두어 주변 사람들을 구제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