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퍼씨빌리티(possibility)와 프로바빌리티(probability)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둘 다 가능성(可能性)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그 쓰임은 다르다. 전자를 ‘확률적(確率的)인 가능성’이라 하고 후자를 ‘실현적(實現的)인 가능성’이라 한다. 확률적 가능성인 possibility는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뜻이고 실현적 가능성인 probability는 가능성이 ‘대체로 높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퍼씨빌리티보다는 프로바빌리티를 우선시(于先視)한다.
과학자들이 휴대전화 전자파를 ‘발암 가능성이 있는 물질(possibly carcinogenic Group 2B)’로 분류한다. 그런데 발암 가능성이 있는 물질은 ‘발암성이 있다고 추정(推定)되는 물질(probably carcinogenic Group 2A)’과는 다른 것이다. Group 2B와 Group 2A는 그만큼 다른 것이다. 또한 안철수 교수가 서울시장 선거를 놓고 박원순 변호사를 지지한 저간의 상황(狀況)에서 ‘철수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확률적인 가능성(possibility)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현적인 가능성(probability)을 말하는 것이다.
‘발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암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 범위(範圍)가 넓다는 것이다. 그만큼 폭이 넓다는 것이다. ‘발암성이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그만큼 암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 범위가 좁아졌다는 것이다. 그 폭이 좁아졌다는 것이다. 범위가 좁아지고 폭이 좁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발생할 수 있는 가능 대상(對象)이 좁혀졌다는 것이고 발생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추정한다는 것은 추측해서 정한다는 것이다. 목표를 정한다는 것이다. 발생부위를 적시(摘示)한다는 것이다. 발생부위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일을 실행하기 전에 사람들은 확률적인 가능성을 먼저 따진다. 퍼씨빌리티를 먼저 본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실현적인 가능성을 따져야 한다. 프로바빌리티를 보아야 하다. 확률이 높다고 반드시 실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확률이 높더라도 현실적으로 실현불가능(實現不可能)한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확률은 떨어지나 그것을 현실적으로 이루어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이 그러했고 노르만디 상륙작전이 그러했다. 확률적으로 볼 때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역으로 기적(奇績)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특히 전선에선 퍼씨빌리티보다 프로바빌리티가 우선이다. 단 1%의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것을 차단(遮斷)하거나 실행(實行)해봐야하는 것이 전쟁이요 전투이기 때문이다. 적(敵)은 섬멸(殲滅)해야 한다. 단 한 명의 적군이라도 그들로 인해 역공(逆攻)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을 만나면 섬멸하도록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군인정신(軍人精神)이고 군인이 지켜야 할 덕목(德目)이다.
정치(政治)는 그게 아니다. 정치는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달려들어야 한다. 타협(妥協)하고 협력(協力)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藝術)’이라 말하는 것이다. 프로바빌리티가 낮더라도 퍼씨빌리티를 보고 쫓아가야 하는 것이 정치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포용(包容)할 줄 알아야 한다. 껴않을 줄 알아야 한다. 비록 나와 의견(意見)을 달리하고 비전(vision)을 달리하더라도 공생(共生)하고 공존(共存)할 줄 알아야 한다. 가장 잘 하는 정치는 1%만 이기는 정치다. 100%를 이기려고 해선 안 된다. 적을 만나 섬멸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 화합하고 윈윈(win-win)해야 한다.
비결(秘訣)은 간단하다. 당리당략(黨利黨略)을 떠나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국민을 먼저 생각하면 된다. 개인의 영달(榮達)보다 국익(國益)을 위해 헌신(獻身)하면 된다. 우리에겐 그 같은 삶을 살다간 선조(先祖)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 거룩한 삶을 살다간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간방(艮方)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