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묵(金平默, 1819~1888) 선생은 화서 이 선생의 수제자(首弟子)로 성리학자이며 교육자이며, 선생의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庵), 시호는 문의(文懿)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1818년 9월 6일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시우촌에서 성양(聖養)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께서 중암을 회임했을 때에 꿈에서 용과 범을 보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암은 5세에 천자문을 10일 만에 떼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으며, 13세에 소학과 사서 그리고 경서를 이미 통달하였다고 한다.
1836년 18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중암은 돌림병인 열병에 걸려서 병이 옮는 것이 두려워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고, 집이 곤궁하여 장례를 모실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 때 마침 식년시가 거행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글을 팔아 장례모실 것을 권하자, 명확한 세 가지 근거를 들어 끝내 권유를 뿌리쳤다고 한다.
중암은 1842년 24세에 벽산으로 글과 폐백을 보내어 화서 선생 제자가 되었고, 그 다음 매산 홍직필 선생에게 글과 폐백을 보내어 제자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두 문하에 출입하면서 모두 스승으로 높이 받들었는데, 특히 화서 선생을 진심으로 복종하여 섬겼다고 한다.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자, 선현을 제향 하는 곳에 한 차례 인사가 있어야 한다며 기읍(畿邑)의 각 서원을 두루 찾아다니며 전하기도 하였다. 55세 때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슬퍼함이 예를 지나쳐 주위 사람들이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암 선생은 1881년 척화 사상을 주장하는 항의 상소에 앞장섰다가 그 해 8월에 나주에 지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렇게 조선후기에는 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흑산도, 지도, 임자도 3곳이 자주 유배지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재집권을 하게 되자, 64세의 중암은 임오년 7월 지도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다시 임오년 군란 때 사면된 모든 사람은 먼저 유배지로 유배시키라는 명으로 다시 지도로 유배되었다가, 1884년 66세 되던 11월에 사면되어 돌아온다.
중암이 전라남도 지도로 유배 갔을 때에도, 그분의 높은 학식을 배우고자 모여드는 선비들에게 강학활동을 계속하여서 영암지역에 화서연원을 배출하기도 했는데, 이때 서당이 위치가 현재 지도읍 두류산 정상부에 있는 두류단이라고 한다. (신안군 향토자료 제7호로 지정)
이곳에는 1914년에 호남지방에 학문과 사상에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세분을 단비로 모시고 있어 3현단이라 칭했는데, 이중에서도 지도에 직접 영향을 끼치신 김평묵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이곳 선비들이 제단이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임자도에도 화산단이라는 제단이 현존하고 있는데, 1918년에 중암의 영향을 받은 임자도 유림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서 단을 세운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도 매년 음력 9월 15일에는 중암 선생을 추모하는 제향이 매년 행해지고 있는데, 무안, 임자, 증도 등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유림들이 제사에 참여한다고 한다.
이렇게 높은 학문과 사상을 지니셔서, 가는 곳마다 제자들이 넘쳐났지만 중암 선생은 벼슬을 극구 사양하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가셨으며, 사방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활동을 하였는데, 가평군 설악면에 대곡서당(大谷書堂)과 한포서사(漢浦書社), 춘천시 신동면 용담서사(龍潭書社), 가평군 가평읍 자양서사(紫陽書社), 충청남도 논산군 향산정사(香山精舍)에 초빙되어 강학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벽계연원록(蘗溪淵源錄)』에는 중암이 배출한 제자 340명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니 가히 짐작할만한 인품이었다.
선생이 68세 되던 1886년에는 포천 백운산 하에 운담정사(雲潭精舍)를 세우시고 강학을 하였으며, 상계(上溪)에 거연대(居然臺)를 쌓고 향음주례를 행하였고, 거처하는 방에 주자‧우암‧화서 세분의 묵화(墨畵)를 그려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그리고 강학을 할 때에도 문도들과 함께 분향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중암 선생에 사저 터에 세운 운담영당(雲潭影堂)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1891년 12월 20일 중암 선생이 운담정사에서 돌아가시니, 사림장으로 영평 어사동 간좌에 장사지내는데, 묘표는 최익현이 짓고, 행장은 홍재구가 지었고, 제문으로는 유중교․최익현․유기일․홍재구․정의림 등이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중암 김평묵선생이 유배지에서조차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여, 그곳에 향교가 건립되기까지 학문적, 사상적인 가르침을 주었던 중암 선생을, 마치 내 고장 역사인물로 생각하면서, 유림의 성지로 개발하려는 지도라는 섬마을 현지 주민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마음이 숙연하기까지 한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중암 선생이 태어나시고 수많은 저서를 남기시고 생의 마지막까지 강학하시다 하세하신 포천에서는, 과연 그분을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낯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어떻게 생각하면 요즘은 자신의 조상을 섬기는 일조차 외면하고 있는 때에, 지금까지도 중암 김평묵 선생에 대한 사상적 명맥을 계승하고 제향을 모시고 있는 호남의 유림들이 고맙기까지 한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희용 / 제3대 포천시예총 회장, 광릉 숲 시인, 연극인, 칼럼니스트, 한국스카우트 경기북부연맹 감사, 포천시 수능시험장 유치추진위원장,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지역사회복지협의체 초대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