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현갱장(解弦更張)이란 말과 교주고슬(膠柱鼓瑟)이란 말이 일반 사람들에겐 낯설지도 모른다. 해현갱장이란 느슨해진 거문고 줄을 다시 팽팽하게 고쳐 매는 것을 말한다. 그 반대는 교주고슬이다. 줄이 잘 맞았을 때 기러기발을 아예 아교로 붙여놓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 보자는 것이다.
초짜들은 줄 맞추기가 영 어렵다. 맞은 상태가 내쳐 유지되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안 된다. 거문고 줄은 날씨나 습도(濕度)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늘어났다 수축(收縮)되었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러기발을 아교로 딱 붙여 놓으면 그때그때 제대로 된 음을 맞출 수가 없다. 변화에 대처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해현갱장을 말하는 것이다.
두 개의 글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어려울 때일수록 긴장(緊張)을 늦추지 말고 기본으로 돌아가 원칙(原則)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편안함을 선호(選好)한다. 편안함에 안주(安住)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거문고 줄이 늘어지듯이 편안함에 길들이게 되면 나태(懶怠)하게 된다. 안거사위(安居思危)라는 말이 있다. 편안할 때 위험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편안함은 빠져들기 쉬운 치명적 독(毒)이자 유혹(誘惑)이다. 그 터널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관성(慣性)과 타성(惰性)의 매너리즘(mannerism)에서 빠져나와 초심(初心)의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줄이 낡아 오래되면 아예 줄을 풀어서 새로 다시 매야 한다. 그리하면 늘어지던 소리가 차지게 되고 흐트러진 음(音)이 제자리를 찾는다. 이것이 해현갱장이다. 거문고 줄이 영 안 맞으면 줄을 풀어 다시 매야 하듯이 정치가 난맥상(亂脈狀)을 보이면 방법을 바꿔 다시 펼쳐야만 질서가 바로 잡힌다. 줄을 바꿔야 할 때 안 바꾸면 훌륭한 악공(樂工)도 연주를 못 한다. 고쳐야 하는데 안 고치면 아무리 어진 임금도 다스릴 수가 없다.
해현갱장해야 할 때 교주고슬을 고집하면 거문고를 버린다. 고집을 부려 밀어붙이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사실[fact]을 사실대로 봐야 한다. 사실을 포장하거나 왜곡(歪曲)해서는 안 된다. 제 악기가 내는 불협화음(不協和音)은 못 듣고 듣는 이의 귀만 탓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전에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문제없을 거야 하며 아교만 찾는다. 남들은 듣기 괴롭다고 난리인데 제 귀에는 안 들린다. 줄을 풀어 새 줄을 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매사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가 언제나 위기(危機)다. 이젠 괜찮겠지 싶으면 바꾸라는 신호다. 기성(旣成)에 안주하면 안 된다.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 예술의 세계에서 자족(自足)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추구(追求)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 또한 그러하다. 구태(舊態)를 벗어나야 한다. 과감하게 패러다임(paradigm)을 바꾸고 새로운 정책(政策)을 내놔야 한다. 시대의 흐름[trend]을 바로 읽어야 하고 시대정신(時代精神)을 똑바로 반영해야 한다.
사람들의 인식(認識)이 달라졌고 소통방식(疏通方式)이 달라졌다. 그것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배고파서 우는 것이 아니라 배 아파서 우는 것이다’ ‘사촌(四寸)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그 배경(背景)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근저(根底)에 깔려있는 민심(民心)을 살펴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지향(指向)하는지 살펴야 한다. 비전(vision)을 제시하고 죽비(竹扉)를 들어야 한다. 대중이 원한다고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포퓰리즘(populism)일 뿐이다. 대중주의(大衆主義)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교주고슬일 뿐이다. 교주고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해현갱장을 해야 한다. 정치는 거짓을 말하고 작가는 상상을 말한다. 언론은 그게 아니다. 언론은 사실(fact)을 말해야 한다. 사실을 비껴간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명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