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일 새벽 3시 지리산 백무동 주차장에 도착. ‘백무동에서 천왕봉까지 7.5km, 천왕봉에서 하산지점인 대원사까지 12km, 천왕봉에서 탈출로로 중산리 내려오면 6km, 그러나 탈출로로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심하고 험하며 오후 2시까지 하산’이라는 말을 듣고 막연했던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옴을 느꼈다.
지난 여름 설악산 18km를 15시간 걸려 내려온 나로서는 겨울 새벽산행의 거의 20km를 11시간 만에 완주하기란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3개월 정도는 산행을 하지도 않았다.
12월 한 달은 크고 작은 음주행사에 젖어 다리의 근력은 이미 바닥이 나있는 상태, 하루 전에 갑작스런 결정으로 따라 나선 무모한 산행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시작도 안하고 못 올라간다고 할 수는 없었다.
천왕봉 정상에서의 찬란하게 떠오르는 일출은 아니어도 드넓은 운해에 둥둥 떠다니는 섬 같은 산봉우리들의 꿈같은 모습을 상상하며 나의 의지력에 몸을 맡겨보자 마음먹었다.
ⓒ (주)포천신문사
사람들은 자꾸만 앞으로 추월해 가고 새로 구입한 방한용 등산화 바닥은 바위에 부딪쳐 다리가 꼬이고 숨은 턱까지 차오르는데 옆에서 따라오는 친구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숨 안차냐”는 나의 말에 그냥 웃는다.
“반도 못왔는데 힘들다”고 하니 “반의 반도 못왔다고 힘내라”고 한다. 천왕봉의 겨울날씨는 영하 30도 이상 춥다는 말을 듣고 속바지는 두개를 껴입었다. 다리가 들어지지를 않아 등산로를 벗어난 숲에서 속바지를 하나 벗어야 했다.
뱀사골 등산로의 편안했던 길을 생각했던 건 큰 오산이었다. 일행들과는 거리 차이가 벌써 많이 나 버렸을 테고 눈앞에 나타난 표지판에는 백무동 1.7km, 천왕봉 5.8km, 이쯤 되면 결정을 내려야했다.
체력도 따라주지 않았고 일행들과의 하산 약속시간도 도저히 맞출 수 없을게 뻔하기에 친구를 혼자 올려 보내고 올라갔던 깜깜한 길을 다시 내려오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 마다 “벌써 올라갔다 내려오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포기했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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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백무동 주차장에는 비닐하우스에 난로를 피워놓고 등산객들에게 무료로 차를 마실 수 있게 해 놓았다. 땀으로 젖었다 식어 써늘해진 몸을 녹이기에는 더 이상 고마울 데가 없었다. 친구에게 전화해 보니 일행들과 만나 천왕봉에 가까이 갔고 중간에 같이 하산할까 생각도 했지만 내 마음이 더 불편할 것 같아 미안했지만 혼자 내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새해 첫날 준비 없이 떠났던 산행은 큰 교훈을 주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준비 없이는 죽을 각오로 해봐야 죽을 수밖에 없겠다”는 것을…. 천왕봉 중도 포기는 2012년 첫번째로 잘한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