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한해가 아쉬워 12월, 지방신문에 ‘詩·몽상’이란 졸 詩 한 편 발표한 적이 있다. 막상 달력 안에 달랑달랑 남은 숫자 몇 톨 훔쳐보니 마음이 허허하다. 올 한해가 밋밋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중얼거려보기도 한다. 나에게 깜짝 놀랄 일이 있었으니 무척 아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놀랄 일 덕분에 나는 나를 뒤돌아보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행 중 다행! 이 어찌 고맙지 않을 수가 있는가?
나에게 올 한해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해였다. 문득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한 구절이 생각난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다.”아쉬움도, 기다림도, 하나의 아름다운 마무리라 생각한다. 나에게 주어진 어떠한 것에도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도 기억에 남은 것 중 하나는 올해 문학상 하나 받은 기쁨이다. 제1회 석파문학상 공모전에서 나의 제2시집 ‘달거리’가 본상에 선정됐다. 이를 두고 부산에서 여고 선생으로 재직 중인 수필가 친구는 부러워하면서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상금이 부업수준을 넘었네!” 친구 말이 싫지만은 않았다. 하기야 상금 몇 백이 적은 금액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예지에 시 한 편 발표해봤자 몇 만원이 고작이고, 원고료가 없는 문예지가 대부분이고 보면 부러워할 만도 하다.
나는 서툰 시 짓고, 서툰 수필 쓴답시고 이곳저곳에 연재도 하고, 발표도 하고 좀 바빴지만 내 사업은 수준미달이었다. 침체한 경기 탓에 죽을 맛이었다. 밥벌이는커녕 적자였다. 나만 그런지 위기감에 밥줄이 위협받고 있다. 대기업만 호황이고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은 힘든 한해였다. 그래도 작은 희망을 품고 새해를 기다린다.
벌써 잊었는가? /벌써 란 엊그제 한 말/세월도 농익으면 서럽고 슬픈 법/달력 안에 숫자 몇 톨 털어내는가/아쉬움도 사무치면 그리움인가/내 주변을 방황하는 케케묵은 냄새들/아쉬운 이름들/ 그립다
기다림인가?/ 날마다 이별이고 만남인데/어디 마지막이 새삼스럽더냐?/옆길로 새어버린 세월 앞에 선 우리,/그리울 때엔 세상은 이미 하나다/오늘 같이 좋은 날
차오르는 나잇살 보듬고 나 여기, 꽃이 피고 지고 머리칼에 포위당하고 청춘에 점령당한 우리, 송년 파티에서 황홀함을 마셔보면 세월의 진미를 안다 근육의 강인함과 금이 간 나의 기억들 흔적 없는 유서를 쓴다. 그물 통과하는 세월,
벌써 잊었는가? 벌써 란 엊그제 한 말 세월도 농익으면 서럽고 슬픈 법 달력 안에 버거운 숫자 몇 톨 털어내는가 아쉬움도 사무치면 또, 그리움인가 내 주변을 방황하는 케케묵은 냄새들 아쉬운 이름들 그립다 오늘 같이 좋은 날
깜짝 놀랄 일은 대장 내시경 검사결과 창자에 이상이 생겼다. 오십 년을 훌쩍 넘겨 사용했으니 고장이 날만도 하다. 문제가 있는 부분을 잘라내고 수리하기로 했다. 아흐레 입원 동안 내 창자는 수리되고 정상을 찾는 중이다. 그래도 이쯤 해서 고장 난 창자를 발견하게 되어 나에게 고맙게 여기고 있다. 지금 통원 치료를 받고 있지만 참을 만하다. 좀 불편하고 제한사항이 많지만, 이것쯤은 이겨내야 한다.
병원 가는 길, 지하철을 탔다. 두툼한 옷 사이로 사람들 냄새가 났다. 사람들 표정 하나하나가 신기하다.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타인의 인상을 바라볼 때마다 나에게 감사한다. 내 주변의 얼굴들이 다가오고 케케묵은 냄새까지 그립다. 우리는 결국 생명의 질서에 순응하고 있음을 타인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한해가 가기 전에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어느덧 지하철이 도착했다. 오가는 발걸음이 세월처럼 바쁘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니 바람이 쌩하다. 두툼한 옷 사이에서 겨울 냄새가 난다. 벌거벗은 가로수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질서를 유지하고 서 있다. 낙엽은 한가하게 나뒹군다.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휑하니, 한해의 아쉬움을 배웅하며 새해를 마중하기 위해 나는 나를 기다린다. 아쉬움은 기다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