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문화재청 초청에 의해 ‘덕수궁지정명칭검토 공청회’에 참여하면서, 덕수궁이라는 궁명 속에는 나라를 빼앗긴 황제의 울분과 망국의 역사, 그리고 식민지배의 흔적과 해방 이후 원칙이 없는 문화유산관리와, 일제가 저지른 철저하고 교묘했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던 행각에 속상함을 금치 못했다.
원래 경운궁은 선조가 왜란을 피하여 파천에서 환도한 후 궁궐이 없어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사용하면서 광해군 때 이름 지었고, 그 뒤 영조 43(1767)년 정해년 6주갑을 맞아 영조가 관심을 갖게 되고 순종 즉위년(1907) 8월에 다시기록에 등장하고 있다.
또한 고종 말년에는 조선이 열강들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왕은 경운궁으로 이어했고, 을사늑약을 비롯한 비운의 역사가 이곳에서 일어났지만, 경운궁은 적어도 순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그 이름을 유지 했으나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고종이 폐위되고 덕수궁으로 격하된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운궁은 1611년부터 300년이 넘게 궁명을 사용한 역사적인 명칭이고, 고종황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친히 정사를 살피던 대한제국 황실의 명실상부한 법궁(法宮)이었으니, 현재 사용하고 있는 덕수궁은 당연히 경운궁으로 궁궐 명칭을 고쳐야만 온전히 우리의 정통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1907년 경운궁의 명칭이 덕수궁으로 개칭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력으로 고종이 황제 자리를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전 황제의 거처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원래 명칭인 경운궁으로 돌려놓아야 하는 것은 일제가 훼손한 언어적 침략을 해소한다는 측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비슷한 예로 창경궁을 들 수 있는데, 1909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가자 일제통감부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식물원을 창경궁에 만들고 명칭을 창경원으로 격하했다. 1984년 서울대공원으로 동‧식물원이 옮기기 전까지 창경원으로 불렸는데, 이는 조선왕궁을 동·식물원으로 만들어 버린 대표적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덕수궁의 유래를 살펴보자. 우리 역사에서 국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궁 이름을 바꾼 사례로 조선 태조가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준 뒤 정종실록 2년 6월 1일조에 ‘상왕전(上王殿)을 덕수궁이라 칭하고, 그 관부를 승녕부 한다’는 기록이 있고, 태조 때의 이러한 고사에 따라 순종 때에 상황제 고종이 머무는 궁궐과 관부의 이름을 태조 때의 것을 답습한 것으로 1907년 일제의 압력에 의해 고종이 순종에게 황제위를 양위(讓位·왕의 자리를 물려줌)한 직후 덕수궁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은 1905년 11월 18일 오후 경운궁 앞 대안문과 회의장에는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는데, 기병 800명, 포병 500명, 보병 20,000명 등이 한양 전역을 포위하는 총칼의 위협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경운궁 중명전에서 강제로 체결한다.
이렇게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강제된 을사늑약은 외교권 상실로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몰락을 의미했다. 당시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노력을 지속했다. 고종은 1906년 6월 22일 ‘을사조약이 불법,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뜻을 친서를 통해 밝혔다.
그리고 전(前) 의정부참판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검사 이준(李儁),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 등 3명의 밀사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밀사들은 만국평화회의 의장을 방문하여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을 요청했으나 면회마저도 거절당하여 본회의 참석이 좌절된다. 그러자 이준은 일본의 폭력적 재앙에서 조국을 지키지 못하는 근심이 분통이 되어 음식을 끊었고, 이 때문에 병이 생겨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했다. 이후 이들은 궐석재판에서 이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종신형을 받음으로써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이 결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밀사파견 사실을 알고는 일본 장교단을 거느리고 고종을 찾아가 협박한 후 고종의 폐위를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했다. 그 후 일제는 고종을 감금하고, 신하들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하여, 마침내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는 형식으로 폐위 당했다.
순종은 즉조당에서 즉위하고는 융희로 연호를 개원한 날짜에 경운궁을 ‘덕수궁(德壽宮)’으로 칭하였고, 고종이 1919년 함녕전에서 붕어(崩御)하면서 덕수궁도 궁으로의 수명이 끝이 난다. 이렇게 덕수궁은 고종황제가 순종에게 양위한 뒤에 고유한 궁궐 이름이었던 경운궁을 격하하여 상왕의 궁궐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10년 일제강점기에 명치천황(明治天皇)이 보낸 조서에는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이라고 황제의 명칭을 왕으로 격하하여 칭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머물던 궁궐이 엄연히 그대로 그 자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례를 따른다는 명목으로 고의적으로 궁궐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어 불렀던 것이다. 문제는 일제가 물러나고 해방을 맞이한 이후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이 총칼로 위협하며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이때 고종은 이 불평등한 사실을 알리고자 헤이그 만국박람회에 밀사를 파견하였으며, 이에 따른 경비를 부담했다고 하여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면서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궁명을 격하시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제에 강압에 의해 지정된 궁궐의 명칭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역사의 유물을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니, 덕수궁의 명칭은 원래대로 경운궁으로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희용 / 제3대 포천시예총회장, 광릉 숲 시인, 연극인, 칼럼니스트, 한국스카우트 경기북부연맹 감사, 포천시 수능시험장 유치추진위원장,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지역사회복지협의체 초대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