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때부터 선조 때까지 정승을 지낸 사암 박순선생은 학문 외에 시와 서예에도 두루 능한 인물이었다. 또한 사암 선생은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고 늘 겸손해 일찍부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얻기도 했다.
선조 때 그분이 대제학에 있을 때였다. 성리학의 거물이었던 퇴계 이황을 예문관 제학의 벼슬에 임명하려했다. 당시 퇴계는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까지 학문적 업적과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한 이황은 박순보다 나이도 많았다. 아무리 임금의 결정이었지만 박순은 자신보다 학문도 뛰어나고 연륜이 높은 이황을 자신의 아래에 둔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임금에게 나아가 자신의 생각을 전하게 되는데, 광해군 때 편찬된〈선조실록〉원본은 그대로 두고 수정·보완하여 또 발행한 선조 수정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황(李滉)에게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직하게 하였다. 그때 박순(朴淳)이 대제학, 이황은 제학(提學)이었는데 박순이 사양하기를, ‘나이 많은 석유(碩儒)가 차관(次官) 자리에 있고 신이 후진(後進)의 초학으로서 그 위에 있는 것은 맞지 않은 일이니 서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여 이 명이 있었다. 그러나 황이 다시 굳이 사양하여 갈리었다.【태백산사고본】【영인본】 25책 410면
이렇게 사암 박순선생은 임금의 은덕으로 대제학에 이르렀지만, 학문에 있어서 뛰어난 실력과 연륜을 갖추어 뭇 선비들의 귀감이 되고, 덕이 높아 칭송이 자자했던 퇴계 이황을 제학이라는 낮은 벼슬에 두고 자신을 대제학이란 높은 벼슬에 두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낭비가 아닐 수 없다고 하며, 인재등용을 거꾸로 하였다며 본인의 관직과 이황의 관직을 바꾸어 재임명해 달라고 임금에게 청하기도 했다.
이런 박순선생의 말을 들은 선조는 다른 신하들과 그 일을 상의했다. 그래서 사암의 지혜로운 선택을 존중해 주기로 결정을 내렸고, 선조는 재임명을 내리면서 그의 성품에 감동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황이 굳이 사양하여 다시 갈리었다고 한다.
사암 박순선생은 척신 윤원형을 탄핵하여 제거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고, 그 뒤 대제학·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72년(선조 5)부터 약 15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동서당쟁이 심할 때 이이·성혼 등을 편들어 상소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하게 된다.
한편 사암 박순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때의 기록은 이러하다. (선수 20권, 19년(1586 병술 / 명 만력(萬曆) 14년) 7월 1일(갑오) 3번째 기사) 전 영의정 박순이 영평(永平)의 산중으로 물러갔다. 박순이 오랫동안 강촌(江村)에 있었으나 상이 다시 부르지 않자 이에 초천(椒泉)에 목욕간다는 핑계로 영평현(永平縣)으로 떠날 때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 도성 문 밖에서 술을 내리니 박순은 즉석에서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성은에 보답할 길 없어 이 마음 어그러져, 쇠잔한 몸 이끌고 시골로 돌아가네. 한 점 종남산은 점점 눈에서 멀어지고, 서풍은 눈물을 휘몰아 벽라의를 적시네’ 하였다. 상이 그 시를 보고 이미 돌아갈 결심을 한 것을 알고 곧 교지를 내려 돌아오도록 독촉하였지만 박순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의정부 영의정 박순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이 기록한 그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박순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이다. 박순은 타고난 자품이 청수(淸粹)하여 마음이 평탄하고 화평하여 남과 대립이 없었다. 일찍부터 서경덕(徐敬德)에게 수학(受學)하고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이황이 항상 칭찬하기를, “박순과 상대하면 마치 한 덩이 맑은 얼음과도 같아 신혼(神魂)이 아주 상쾌하다.”하였다. … 박순은 스스로 경국제세(經國濟世)에 부족하다 하여 오로지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양보하였으므로 이이와 성혼을 힘껏 천거하였고 시종 협력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격동의 시대에 벼슬자리를 놓고 서로 싸움을 벌이거나, 다른 이를 치고 올라가 권력을 휘둘렀던 때에도,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능력 있는 인재를 천거하여 자리를 양보하였던 사암 박순 선생의 겸양지덕은, 작은 권력에도 서로 피를 흘리며 이전투구(泥田鬪狗)를 일삼고 있는 지금의 정치인들이 반드시 귀감으로 삼아야 덕목이라 할 것이다. 사암박순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는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고, 옥병서원에 배향되어 포천의 유림들이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희용 / 제3대 포천시예총회장, 광릉숲 시인, 연극인, 칼럼니스트, 한국스카우트 경기북부연맹 감사, 포천시 수능시험장 유치추진위원장,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지역사회복지협의체 초대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