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 양사언은 조선 중종 12년(1517)에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우리가 현재도 부르고 있는 지명인 틀무시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신북면 기지리에는 대대로 윗마을에는 양씨가 아랫마을에는 유씨가 살고 있다.
한편으로 양사언은 태어날 때부터 모습이 수려하고 맑으며 정신(精神)이 뛰어나서 그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한 출신신분이나 성장과정이 남들과 구별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문헌에 남은 기록에서도 그에 대한 인물평도 여느 사람과는 특별하다.
특히 조선 정조 때 심진현(沈晉賢) 등이 왕명에 의해 조선 태조에서 숙종시대까지의 인물의 약전(略傳)을 수집하여 만든 책인 인물고(人物考)에는 “양사언은 세상에 뛰어난 재사로서 학문이 두루 통하고, 많은 서적을 읽어 식견이 고매하였다. 또한 지조가 굳고 결백하였다.…급제하여 40년간이나 이름난 고을을 맡은 것이 여덟 고을이었음에도 한 푼도 가족을 위해 남기지 않았으며 생계를 위해 쓰지 않았다.…세상에 뛰어난 재사로서 시와 필법이 기이하고 힘찼으며 산수를 즐겨 유람하여 세상 사람들은 신선(神仙)의 풍채(風采),도인(道人)의 기골(氣骨) 이라고 칭송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나이 24세(1540)에 「단사부(丹砂賦)」를 지어서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어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함흥부윤(咸興府尹) 등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떠난 고을마다 주민들은 그의 공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품계가 통정대부까지 이르렀으니 관리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봉래 양사언에 대한 평가는 관리나 문장가보다는 서예가로 더 인정을 받고 있으며 도가적 취향을 지닌 인물로 대표되고 있다. 이는 그의 생의 대부분을 관료로 있었지만 유가적이기 보다는 불교적이고 만년에는 도가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기에 그런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한편 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인 봉래(蓬萊)로 호를 삼아 도가적인 기풍을 보여주었기에 전설과도 잘 어울려서, 기이한 행동을 하거나 이상스러운 문구는 찾지 않아도 널리 인정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를 짓되 표현이 기발하고 속세를 초월할 정도로 타고난 문장을 발휘하여 그의 작품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는 천사의 옷은 꿰맨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 완전함을 이르는 말이다.
양사언은 금강산이 자신의 살과 뼈이며 마음이고 전체인 것을 느끼면서 금강산을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다. 산을 좋아하고 산에서 살다 간 사람들은 한없이 많지만 특히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은 금강산을 샅샅이 답사하여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금강의 뛰어난 경치에 도취되어 금강을 집으로 삼고 구름과 노을을 울타리로 삼으며 금강에 살았으리라. 내금강의 섬세하며 찬찬하고 잔잔함도 사랑하였고, 비로봉 너머 구룡연 폭포를 지나 금강산의 남성적인 웅장하고 거세고 진취적이며 활달한 기개에도 감탄하여, 신계사 부근의 동석동(動石洞)에서 아침이면 안개를 마시고 저녁이면 구름을 밟고 교교한 동석동의 달빛도 즐겼음직하다.
또한 말년에는 안변부사로 임명되어 효제(孝悌)로 교화(敎化)하여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북방의 외침을 대비하고 군초(軍草)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한 상황을 극복하는 예지력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의 묘소인 지릉(智陵)의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인하여 그 책임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 결국 선조 17년(1588)에 68세로 생을 마치게 된다.
왕방산을 노래하고 반월산을 생각하며 불정산을 품격 높은 문장과 필체로 그려냈던 포천이 낳은 천재적 문장가이며 조선 3대 명필가로 꼽히는 봉래 양사언, 이제 그분의 공덕과 업적을 찬찬하게 찾아내어 스토리텔링을 통한 컬처노믹스를 기획해 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