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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 화장장과 축제 그리고 양심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1년 09월 18일
↑↑ 이희용 칼럼니스트, 포천신문 자문위원
ⓒ (주)포천신문사
발표된 지료에 의하면 지난 7월말 포천지역은 유례 없는 집중호우로 인해 8명이 사망했으며, 11명이 부상을 입고 가옥이 떠내려가거나 침수돼 345가구 819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37가구 98명이 대피하기도 했으며, 도로, 교량, 하천, 상하수도, 교통시설, 산사태 등 공공시설 440개소가 유실되거나 파손되었다.

또한 실종자 한 명이 뒤늦게 강화도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안타까움을 더했으며, 이렇게 일반 피해지역에 비해 포천의 피해규모가 참혹하고 엄청나서 국가에서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여 복구비용을 지원하지만, 포천시가 피해 복구에 부담해야 비용도 수백억에 달해, 열악한 우리시의 재정여건을 비추어 부담스럽다고 모두가 걱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장사 차량이 포천의 전역을 매일 통행해야하고 모두가 자기지역에는 유치를 기피하고 있으며, 포천시와 경기북부권역 7개 시·군이 공동으로 사용하게 된다는 광역화장장 건립 사업도 성급한 추진으로 인한, 해당지역 주민들의 거센 항의에 부닥쳐 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최근에는 주민들의 광역화장장 선정기준에 대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최종 후보지로 영북면 야미1리를 우선협상지역으로 결정하여 주민들의 시위격화와 반발이 더욱 확산된 바 있다. 급기야 속상한 주민들이 시청으로 몰려와 가슴이 터져라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그래서 광역화장장 사업은 주민과의 물리적 충돌로 치달아 결국에는 광역화장장사업과 관련한 모든 행정 절차가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런 어려운 상황과 상처받은 주민들의 절규 속에서도, 지난해부터 증명되지 않은 시점을 특정하며 언론에 보도된 내용대로, 3년간 18억의 예산을 투입하여 축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추진한다는 방침으로 시행하던 포천 600년 기념사업도, 고려시대부터 지명을 포천이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발견되어, 시대를 특정한 시점의 오류 여부를 밝혀서 사업의 타당성 여부를 확인해야 할 시점에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언론에 보도된 포천시 연혁오류에 대한 포천시의회 정종근 의원의 시정 질의에 대한 답변 내용에서도, 서장원 시장은 “세종실록 지리지 포천현조에 의하면 태종 13년 즉 1413년 ‘군.현의 명칭에 주(州)자를 쓴 고을은 주.부.군.현의 주(州)와 혼동되니 모두 산(山)이나 천(川)으로 개칭하라’는 명을 내려 이때 포주는 포천으로 지명이 바뀌게 되어, 포천 지명 사용 시점은 1413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역사 지리서 어디에도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는 기록은 있어도 지명을 포천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문헌에 기록된 바로는 포천이라는 지명이 고려 때부터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범부인 필자가 보아도 확실해 보이지만 근거로 제시한 자료에 대한 명확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지난번 지면이 허락지 않아 게재하지 않았던 문헌 자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 6권 경기 114쪽에서 고려 공양왕 2년에도 포천이라는 지명을 사용한 근거자료를 제시하니 포천시는 전문가의 확실한 판독을 의뢰하여 내용을 공표하기를 바란다.(사진자료 참고)

↑↑ 참고자료1(신증동국여지승람” 6권 경기 113쪽)
ⓒ (주)포천신문사

↑↑ 참고자료2(신증동국여지승람” 6권 경기 114쪽)
ⓒ (주)포천신문사

필자가 제시한 기록은 포천이라는 지명이 조선 태종13년 1413년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답변 자료와 비교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 공양왕 2년은 서기 1390년으로 이 기록에 새로 포천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고려 공양왕 이전에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다.

또한 포천시가 지명사용 근거로 제시하는 조선왕조실록 태종 26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10월 15일(신유) 1번째 기사인 일명 ‘계사의 예’의 근거 내용이다.

○辛酉/改各道各官之號 … 又以各道單府官改都護府, 監務改縣監。 凡郡縣號帶州字者, 皆改以山字川字, 寧州改寧山, 衿州改衿川, 其例也 각도 각 고을의 이름을 고쳤다. … 각도의 단부(單府) 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감무(監務)를 현감(縣監)으로 고치고, 무릇 군(郡)·현(縣)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 천(川)자로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치고, 금주(衿州)를 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

이 ‘계사의 예’를 신증동국여지승람 114쪽에 기록된 내용과 비교하더라도 현재 서울 금천구 지역인 금주(衿州)는 고려 태조23년(940년)에 금주(衿州)로 명칭을 고쳤고, 그 후 줄곧 금주(衿州)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13년(1413년)에 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되었으며, 인천 또한 고려 인종(1122~1146)때에 인주(仁州)로 승격되었고, 조선태종 13년 계사년에 현재의 인천으로 탄생하게 되었다하는 것으로 보아, 이렇게 계사년(태종 13년)에 그 예로 제시했던 금천과 인천이 필자가 제시한 공양왕 2년 기록에는 모두 고려 때 지명인 금주(衿州)와 인주(仁州)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필자가 제시한 기록에는, 고려 때부터 천(川)이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포천(抱川)과 함께, 고려 태조 23년 과주로 개칭된 지명인 과주(果州). 고려 충선왕 2년(1310년)부터 사용했던 양천(陽川), 고려 태조가 이천(伊川)이라 명명한 이천(伊川)이 기록되어 있고, 고려 말기의 지방관인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를 경기지방에도 두었다는 내용이 있어 포천(抱川)이라는 지명이 고려 때부터 사용했다는 신뢰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지역은 수해로 인한 사망, 도로, 교량파괴, 도로파손 등으로 아직도 그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복구예산이 투입될 때까지는 손도 못 대고 있는 곳이 허다하고. 광역화장장 유치로 인한 씻을 수 없는 상호간의 불신과 상처는 언제라도 재발을 염려해야 하는 마치 초상집을 연상하는 상태인데, 증명되지도 않은 시기를 특정하여 축제를 계획하여 한바탕 잔치를 벌인다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는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불요불급한 예산이야 당연히 집행을 해야 마땅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힘들어 할 때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풍악을 자제하고 주민의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 관계자들의 통큰 양심을 기대하는 바이다

이희용 /
광릉숲 시인, 연극인, 칼럼니스트, 한국스카우트 경기북부연맹 감사,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지역사회복지협의체 초대위원장, 포천시 수능시험장 유치추진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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