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매년 개최되는 초등학교 총동문 축제에 참석차 이른 시간에 서울을 빠져나왔다. 세월이 흘러도 고향산천은 변함없이 나를 반겨준다. 장숫골도 개발이란 붐을 타고 이곳저곳 새 도로가 뚫리고 지우천은 하천정비공사로 온통 몸살을 앓고 있다. 유동과 연촌마을로 오르는 새로 개설한 ‘황석산 등산로 따라 친구 몇 명과 황석산성에 올랐다. 황석산성 3킬로미터, 하산 길 1.5킬로미터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등산로가 잘 보존된 것을 미루어 짐작컨대 등산객의 발길이 뜸하다.
4월의 중순이건만 변덕스런 날씨 탓에 황석산은 아직 초겨울 같았다. 여러 해 풍파에 견디어낸 잡목 등 나뭇가지에는 아직 봄기운이 이르다. 석양을 배경으로 황석봉의 괴기한 위용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황석봉 능선을 따라 반득하게 펼쳐진 황석산성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너무나 조용하다. 골짜기 건너편 능선에 ‘피바위’가 미끄러지듯 누워 있다. 아직도 붉은 핏자국이 선명한 듯 다가온다. 백성의 아우성과 왜군의 살육 소리가 진동한다. 피비린내가 흩어진다. 골짜기가 온통 아비규환이다.
다시 눈을 뜨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놈들의 침략이 계속되는 동안 조선은 풍전등화였다. 왜놈은 조선을 말살하기 위해 재차 침략을 단행했다. 바로 1597년(선조 30년)에 있었던 정유재란이다. 남해안으로 상륙한 왜군은 초계와 합천을 걸쳐 진격하였다. 이때 곽재우 장군은 창녕 화왕산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왜군은 전주성과 남원성을 함락하기 위해 먼저 황석산성으로 쳐들어왔다. 제찰사 이원익은 이곳 황석산성에서 안의, 거창, 함양 등 3개 읍의 백성과 군사를 모아 성을 사수하도록 명령하였다. 안음 현감 곽준은 직접 관민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병기와 기재를 정비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위급한 소식을 전해 들은 함양군수 조종도가 가족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왔고, 김해 부사 백사림이 도별장으로 가담하여 황석산성을 끝까지 사수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왜군은 호남 진출의 교두보인 황석산성을 함락하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왜장, ‘고니시 유기나가’, ‘구로다 마가나사’, ‘나베제마 마사시케’ 등 이들이 직접 선봉에 섰다. 왜군은 황석산성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고 진지를 구축하여 음력 8월18일 달빛 아래 조총으로 무장하고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였다.
아군의 진지 역시 튼튼하게 방비 되어 있었다. 관군과 의병은 물론 뜻을 같이하고자 몰려든 남녀노소의 백성까지 모두가 죽음으로 성을 사수하겠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무서울 것이 없었다. 부족한 무기 대신 손에는 낫과 죽창이, 부녀자는 치마로 돌을 운반하여 석전으로 대항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다.
왜군들의 거센 공격에 맞서 싸우는 우리 백성의 호국정신과 우국충정은 눈물겨웠다. 활을 쏘아 적을 거꾸러트리고 돌과 바위를 굴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을 저지시켰다. 우리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왜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사기가 꺾였다. 왜군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왜군은 조그마한 산성하나를 함락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요. 모욕이라 생각했다. 왜군은 성을 함락하기 위해 온갖 회유와 위협을 가해왔다. “성을 비우고 물러간다면 쫓아가 죽이지 않으리라.” 하면서 달래고 꾀었다. 그래도 꿈쩍도 않고 성을 사수하고 있는데 초조를 느낀 왜군은 마지막 일전을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왜군은 전 병력 투입시켜 일제히 공격을 해왔다. 드디어 성내는 화살이 다하고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이에 겁을 먹은 김해 부사 백사림은 도별장의 장수의 직분을 까맣게 잊고 몰래 가족을 이끌고 동북문으로 도망쳤다. 백사림이 지키던 동북문이 열리자 왜군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밑 듯이 쳐들어옴으로써 성안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백병전으로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으로 변하였다. 무자비한 적의 도륙에 비명과 함께 칼날 부딪치는 소리, 바위가 무너지는 소리, 도끼와 몽둥이 부딪치는 소리가 정적으로 감추고 밤새 골짜기와 하늘을 울렸다.
수성의 총책을 진 곽준 선생은 용감히 싸우는 자는 더욱 격려하고 비겁하게 달아나는 자는 목을 베어 경계하면서 자신은 남문 누상에서 사력을 다해 활을 당기어 성벽을 오르는 적을 차례로 쏘아 죽였다. 조종도 선생도 남문으로 곽 선생을 찾아 비장한 결심을 같이하고 적이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군기고에 불을 지르고 마지막 순간까지 불굴의 저항으로 최후를 마쳤다. 조 선생은 부인과 곽 선생은 이자일녀(二子一女)가 다 순사 하여 충효의렬(忠孝義烈)은 천추에 빛을 내었다. 황석산성 전투는 관군과 의병은 말할 것도 없고, 남녀노소 백성 모두가 비장한 각오로 격렬하게 저항하다 장렬하게 순국했다. 황석산성이 함락되자 부녀자들은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성벽에서 낙화처럼 떨어져 순결을 지키니, 온 절벽은 붉게 피로 물들었다. 이 바위가 바로 ‘피바위’라 불린다. 아! 슬프다. 저 헌헌한 무인이 창검을 버리고 도망하는 판에 이 유관유복(儒冠儒服)이 죽음을 서슴없이 택하였느냐, 진정한 용기는 심간(心肝)에 관한 도리라, 골수에 어린 충정에 있음을 이에서 알겠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과 장렬하게 싸우다 순직한 곽준 선생과 조종도 선생, 그리고 우리 백성의 거룩한 모습 앞에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호국정신과 우국충정의 마음가짐을 가다듬게 한다. 어느덧 황석산성에는 기우는 햇빛이 걸려 있고 피바위에는 그날의 비문한 눈물이 붉게 음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