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동계곡의 입구 안내표지판을 보면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천봉만암과 청수옥담의 세계가 마치 ‘천불’의 기이한 경관을 구현한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 하니 그 ‘천불’이란 무엇이며 어떤 곳이길래….
천불동 계곡으로 들어서니 대청봉에서 보았던 공룡능선과 범봉 1275봉 등이 더 가까이 보이고 우리는 그 비경을 배경으로 서로 기념촬영을 해 주었다. 예전에 설악산을 사랑하는 친구에게서 자신이 찍은 천불동계곡 사진을 선물 받았을 때는 내가 이렇게 이곳에 서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아래로 아래로 끝도 없을 듯이 계단과 너덜길은 이어진다. 천불동 계곡 양옆에는 온통 높은 바위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계곡의 물은 긴 가뭄으로 깊지는 않아도 어디나 색이 짙고 푸르고 선녀가 내려온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아름답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조금씩 앞서가는 친구는 나를 기다리는 시간엔 굽이굽이 산아래를 바라보며 회심에 잠기는 듯하다. 노래방에 가면 신성우의 ‘서시’ 노래를 신청하고 나에게 부르라고 했었던 친구다.
“너는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될 수 있었던 수많은 기억들, 내가 항상 여기 서 있을게 걷다가 지친 네가 나를 볼 수 있게…”
노래는 내가 부르고 너의 마음도 내가 들었었다. 앞서 간 친구가 보이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산등성이를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거란 믿음이 있기에. 천불동계곡의 대표꽃인 함박꽃잎이 유난히 희고 청초하다. 지금이 한창 아름다운 시기인가 보다.
↑↑ 설악산 천불동계곡에서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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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가운 계곡물에 10시간을 넘게 걸어온 발을 담그고 함박꽃을 찍으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계곡은 어둠이 빨리 찾아오고 몇 시간을 더 내려가야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갖기로 했다.
희운각대피소를 지나 귀면암이라는 거대한 바위산을 보며 비선대에 도착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비선대까지는 가야한다는 계획대로 시간은 6시가 넘어 7시가 다가오지만 아직은 계곡길을 더 가도 될 만하다. 비선대는 기암절벽 사이에 한 장의 넓은 바위가 못을 이루고 계곡 쪽으로는 미륵봉, 형제봉, 선녀봉이 보이며 미륵봉 등허리에 금강굴이 보인다고 하는데 우리는 금강굴을 찾지 못했다.
비선대를 벗어나는 마지막 다리를 건너면 와선대를 지나 등산로는 끝이 나고 신흥사길로 해서 설악동 소공원까지 3km를 걸어야 한다. 이제는 날이 어두워져 사진을 찍으면 셔터 타임이 길어 흔들려 버린다.
칠흙 같은 어둠속에 발 앞에 동그란 손전등불 따라 뚜벅뚜벅 걸었다. 다리도 아프지 않았다. 가슴과 머리속은 하얗게 비어 버렸다. 마음을 먹으니까 되는구나. 새벽 오색 입구에서의 시작이 까마득한 오래전 일인 것만 같다.
설악동 택시타는 곳에 도착하니 밤 9시다. 우리가 차를 주차해 놓은 오색등산로 입구까지는 택시로 40분 정도를 가야한다. 오색으로 와 숙소를 찾으니 쉴 방이 없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밤 한계령을 넘는 길은 아침에 왔던 것보다 훨씬 어렵다.
야광 화살표로 굽이진 길을 표시해 놓긴 했지만 어느 구간에서는 갑자기 길이 끊긴 듯해 당황하기도 하고, 인제로 들어서니 허름한 모텔이 보인다. 다행히 아래층엔 편의점이 있어 점심으로 싸왔던 남은 반찬 안주삼아 시원한 맥주 한 컵 들이키니 하루의 피곤이 온몸에 녹아내린다. 우리는 죽은 듯이 단잠에 빠져들었다.
며칠이 지나고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을 또 봐야하지 않겠냐" 고 친구는 말한다. 난 일초도 생각할 틈 없이 "미쳤어?"라고 대답했지만 언젠가는 또 갈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이렇게 사진과 글로 설악을 추억하는 동안 벌써 그곳이 그리워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