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수치심(羞恥心)을 느낄 때도 있고 죄책감(罪責感)을 느낄 때도 있다. 수치심은 모자라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고 죄책감은 잘못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수치심은 창피하다는 것이고 부끄럽다는 것이다. 죄책감은 잘못했다는 것이고 양심(良心)에 가책(呵責)을 받는다는 것이다. 수치심은 수오지심(羞惡之心)에서 오는 것이고 죄책감은 뉘우침에서 오는 것이다. 수치심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나 죄책감은 그렇지 않다. 피해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서양학자들은 문화적 사회적 가치(價値)를 위반한 결과가 수치심이고 내적 가치를 위반한 결과가 죄책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치심보다는 죄책감에 더 무게를 두기도 한다. 이 같은 주장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느끼는 수치심이 개인주의에서 오는 죄책감보다 우월(優越)한 면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잘못했을 때는 사회나 타인이 뭐라고 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이를 심리학자들은 ‘건강한’ 죄책감이라고 말한다. 자성(自省)하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후회(後悔)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새롭게 되잡기 때문이다. 건강한 수치심과 죄책감은 바람직한 것이다.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고 성찰(省察)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 사회통합(社會統合)에도 필요한 것이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과오(過誤)를 뒤로 하고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복귀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수치심이 남의 시선을 느낄 때 받는 것이라면 죄책감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러나는 것이다. 수치심은 이처럼 ‘나에 대한 남의 시선’이 작용하는 것이고 죄책감은 ‘나에 대한 나의 소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잘못을 둘러싼 판단 기준이 자아(自我)냐 집단(集團)이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죄책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억울한 개인은 세상이 뭐라고 해도 자신의 결백(潔白)을 위해 싸울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수치심이 지배하는 공동체적 사회에서는 억울한 개인이 자살(自殺)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하기도 한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채근담(菜根譚)에도 나오고 서양의 기독교 전통에서도 언급되는 말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불문하고 사람 사는 곳에서는 ‘죄’라는 화두(話頭)가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응징(應懲)을 말하고 용서(容恕)를 말한다. 통제(統制)도 해야 하고 구제(救濟)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 속엔 그러한 뜻이 숨어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항상 양심(良心)이라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봐야 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利)를 보면 의(義)를 생각하라. 그리고 업보(業報)를 생각하라. 모든 업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모습이 남이라는 거울에 비치는 것이다. 남을 탓할 일이 아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충신(忠信)보다 양신(良臣)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수치심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학생들을 야단칠 때 그들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질책(叱責)한다. 그것이 한계선이다. 학생들을 아무리 혹독하게 야단쳐도 그들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면 진심으로 반성(反省)하고 따른다. 반대로 가벼운 질책이라도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 곧바로 외면한다. 분심(忿心)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치심을 느끼고 의기소침(意氣銷沈)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북돋아줘야 한다. 학생들을 지도하거나 수하 사람들을 부리는 사람들은 이 같은 점을 명심(銘心)해야 한다. 광고 카피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새겨들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