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산을 찾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산이 좋아 산에 간다”라는 말 외에 딱히 어떤 이유가 있어 산에 오르는 것만은 아닐 것 같다. 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산행이 있는 전날 밤에는 소풍날을 기다리는 개구쟁이 아이처럼 마구 설렌다.
우리나라에는 어디를 가든 주변에 많은 산이 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도심 가까이에 산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산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산이다. 높은 산은 높은 데로 낮은 산은 낮은 데로 각각 다른 매력이 있어 좋다.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도 코앞에 부용산(芙蓉山)이 있고, 손안에 잡힐 듯 가까이에 보이는 수락산(水落山)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산을 바라본다. 멀리서 가까이서 바라볼 때마다 새로움을 느낀다. 부용산은 야트막하지만 아담하고 봉긋하다. 신숙주와 세조의 전설이 얽힌 산으로도 유명하다. 동쪽 능선 아래편에는 세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신숙주 선생 묘지가 있다. 세조는 문무를 겸비한 호걸이다. 단종만 폐하지 않았다면 역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 기억할 텐데….
지금 부용산은 국도 3호선 대체 우회도로 부용산 터널공사로 산 아랫부분 일부가 절개되어 상처를 드러내고 신음하고 있다. 부용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면 수락산이 또렷하게 보인다. 수락산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 찾아도 아름답다. 서울 가까이에 있고 산길이 험하지 않아 항상 사람들로 북적댄다.
산은 늘 침묵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지만, 산에 오르는 사람들로 인해 산속은 도시의 소음보다 더 시끄럽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산은 우리에게 뭐라 할까? “여보시오! 사람들아! 너희에게 때와 장소를 구분하고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일러주리다.”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가야 하는’ 세상 이치로 삶과 죽음의 본질을 깨우쳐주는 산은, 배고픔을 달래주고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한다. 산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해주고 온갖 생명이 잉태되고 더불어 사는 기막힌 공간이기도 하다. 산 오르는 사람은 누구나 이 공간에서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되고 철학자가 되기도 하지,
초여름 어느 일요일 금병산(652m) 가는 날 청량리역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댄다. 경기가 어렵다, 어렵다 해도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 표정만큼은 웃음처럼 여유롭다. 북한강을 끼고 달리는 경춘선 열차는 6월의 푸름처럼 싱그러웠다.
김유정은 “30년대 한국소설의 축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한국 문학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산골 나그네』 『동백꽃』 『봄·봄』 『만무방』 등 아름다운 소설을 썼다. 김유정(1908~1947)이 태어난 고향이 실레마을이고 금병산은 그의 고향 산이다. 실레 마을이란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라는 뜻으로, 한자로 표기하면 시루 증(甑) 자를 넣어 ‘증리’라고 한다.
금병산은 김유정과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은 산이다. 능선마다 김유정의 아름다운 소설을 만들어낸 무대이기 때문이다. 응고개는 ‘만무방의 노름터(동굴)의 배경이며,『봄·봄』의 배경은 실레마을 실존인물인 ‘김봉필의 집’ 배경으로 『동백꽃』은 금병산 정상에서 동백꽃 길을 배경으로『산골 나그네』는 신연강 근처 물레방앗간 터를 배경으로 썼다. 그러고 보면 산은 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
“산 오르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 없다.”라는 말을 믿고 싶다. 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인간에 의해 버려진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상처 난 산등선과 산허리, 무분별하게 마구 베어진 죽은 양심을 볼 때마다 허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소음의 공해 또한 가관이다. 나는 틈틈이 산에 오른다. 명지산, 황석산 등 크고 작은 산을 올랐다. 산에서 즐거움을 찾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조망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산과 대화도 하고 산신에게 나의 소원도 빌고, 나무와 바람에 길을 묻기도 하고, 하늘과 땅의 간격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등잔 밑이 어둡듯이 산을 제대로 보려면 산속에 들어앉아서는 산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가슴을 열고 멀리 봐야 만이 산을 볼 수 있다. 나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나의 그림자를 대동하고 산에 오른다. 산 오르는데 반복되는 삶의 찌꺼기들이 내 속에 새통스럽다. 산은 삶의 지혜를 깨우쳐주는 고마운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