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옛날의 사고방식은 무엇이건 주어진 것에 만족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지족안분(知足按分)하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와 우리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메시지입니다. 이 아버지가 ‘우주마음이고 우리의 생각’이며, 조물주이고 근본원료로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존재는 우리가 주는 대로 반응합니다. 주는 과정은 마음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용기와 영감과 건강과 풍요와 같은 ‘생각을 줄 때’ 또 이와 다른 두려움과 실패의 걱정과 불행한 ‘생각을 할 때도’ 그 존재가 반응하여 ‘그 생각한 것들을 불러옴’을 알아야 합니다.
<54>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명제는 생각이 영적인 활동이고, 생각은 창조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생각이 창조력을 가지고 있음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 만족스럽지 못한 것, ‘자기가 불행하다, 가난하다, 병들었다, 약하다, 모자라다, 못 낫다는 등등의 생각’을 강하게 가짐으로서 거기에 창조 에너지를 부어서 그 불만스러운 상황을 더 왕성하게 자라게 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이 어려울수록 현실이 좋아지는 상황을 생각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생각을 해야 현실이 좋은 쪽으로 창조되어 변하므로, 예수님께서 ‘기뻐하라! 감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55> ‘나는 존재 한다 고로 생각 한다.’ 이는 불교의 명제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심장이 뛰고, 혈액이 순환하며, 숨쉬기를 하고, 뼈가 자라고, 세포가 움직이는 활동 등에 기인한 것이지만 우리의 의식, 생각으로는 감히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존재하게 하는 어떤 힘은 ‘의식, 생각’이 아니라, ‘무의식, 초의식, 잠재의식’의 힘입니다. ‘의식, 생각’이 없어도 우리는 생존합니다. ‘우리가 생존하기 때문에 의식하고 생각 한다’는 의식에서 나오는 생각의 창조력보다는 무의식, 잠재의식에서 나오는 창조력이 더 큽니다. 그러나 대기가 약간만 변해도 풍향계가 움직이듯, 의식이 작은 생각만 해도 잠재의식이 움직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생각을 지금 하고 있습니까? 살피고 또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56> 생각의 창조력이 이 인간세상을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는 ‘무념-생각 없음’을 강조합니다. 왜 그럴까? 의식에서 나오는 생각의 창조력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나누고 비교하면서 분별하므로 그 힘이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초의식-잠재의식’은 보편적인 것이므로 구분하고 분별하지 않으니 그 창조력은 무한합니다. 생각은 하지 않아도 우리가 생존할 수 있지만, 무의식-초의식-잠재의식-‘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깨달으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생각의 창조력으로 하는 활동을 ‘유위’라 하고,무의식-초의식-잠재의식의 활동을 ‘무위’라고 합니. 생각의 창조력은 수단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생각을 내는 의식, 더 나아가 의식을 내보내는 초의식-잠재의식, 우주의식, 이것이 주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에 아는 것-의식이 충만해 있음을 모르고 삽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을 우주가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