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에 찾은 고향인가. 고향은 언제나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요, 아버지의 너른 가슴이다. 시원스럽게 뚫린 서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서상'톨게이트로 빠져나온다. 여기서 20여 분쯤이면 고향에 도착한다. 고향의 높디높은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맑은 공기를 마시면 묵은 체증이 펑 뚫린다. 중학교 다닐 때 일두 선생 고택이 있는 마을,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여기가 성리학자, 실천 철학자, 도학의 종(宗)인 동방의 별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 고택이 있는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마을이다. 개평리는 행정구역상 지곡면에 속하지만, 안의면과는 접경지역이다. 안의(安義)에서 함양(咸陽)방향으로 24번 국도로 따라가다 보면 마을 간판이 보인다.
도로를 정비해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마을 입구를 알려주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고요한 마을 전체가 평화롭기만 하다. 상쾌하고 맑은 바람을 맞으며 골목길을 걷다 보니 제법 규모 큰 한옥이 여러 채 눈에 띄고 거슬러 오르는 마을 건너편에는 노송들이 마치 병풍을 쳐놓은 듯 줄지어 서 있다.
조금 더 올라가니 골목 안으로 힘찬 용마루 선들이 여러 겹 겹쳐 보이는 웅장한 한옥이 돌담 넘어 보인다. 골목을 따라 죽 들어가면 솟을대문의 문간채가 나타난다. 대문 옆 안내판에는 '중요 민족자료 제186호 함양 정병호 가옥'이라 적혀 있다. 솟을대문에는 나라에서 내린 정려패(旌閭牌)인 홍패가 5개나 높이 걸려 있다.
그 맨 위의 것은 “효자통정대부 판전농시사 정복주시문(孝子通政大夫判典農寺鄭復周之門)”이라 새겨 있다. 대대로 효자와 충신을 배출한 영남의 명문대가임을 말해주기도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은 이 집을 방문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문에서 바로 들여다보이는 사랑채는 ㄱ자 팔작집으로 들축대가 높직하고 추녀는 활주로 받쳤을 만큼 날개를 펴서 더없이 시원스러운데 툇마루 한쪽을 약간 올려 앉혀 누대의 난간처럼 감싸 안았다. 사랑채 옆으로 난 일각문(一角門)을 통하여 안채로 들어서니 앞마당이 직사각형으로 길게 뻗어 아래채와 사랑채로 연결된다. 사랑채 뒤쪽으로 툇마루를 붙여 안팎으로 분리된 공간을 하나로 묶어놓다.”
대대로 효자와 충신을 배출한 영남의 으뜸 명문대가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서부 경남의 옛집을 둘러보며 집주인에게 볼만한 다른 집을 청하면 이구동성으로 추천하는 집이 하나 있다.
“지곡 개평마을의 일두 선생의 고택을 가보셨나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두 선생은 소위 뼈대 있는 고장, 뼈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옛말에 '좌(左)안동, 우(右) 함양, 이라는 말이 있다. 즉 왼쪽에 안동이 있으면 오른쪽에는 함양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지리산 북쪽 자락과 덕유산과 사이에 있는 함양은 거연정이나 동호정, 노월정, 심원정, 덕천서원, 정여창 고택 등에서 볼 수 있듯 양반문화가 발전한 지역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경북 안동 못지않은 뼈대 있는 고장이다.
이 고장 사람들의 기질을 바로 대변하는 말이 있다. “K고장 산 사람 열 명이 A고장 송장 한 사람을 못 당한다.”라고 했다. 이 말뜻은 산악으로 둘러있는 가난한 고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에서 나온 말이며, 불같은 기개를 나타낸 말일 것이다.
↑↑ 심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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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과 ‘청계서원’은 함양의 학문을 잘 대변해 주는 곳이다. 특히 남계서원은 경북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설립된 역사가 깊은 서원이다. 정여창 사후 약 49년 만인 명종 7년(1552년)에 설립된 이후 명종 21년인 1566년에 이미 왕으로부터 사액 받았고,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되었던 서원철폐 때에도 다른 46개 서원과 함께 살아남을 정도로 유명하다.
안음 현감(安陰縣監. 현재의 안의면)을 지낸 정여창(세종 32년. 1450)~연산군 10년. 1504)은 이조 성종 때의 학자로 자는 백옥, 호는 일두(一蠹),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 을육(乙六)의 아들이다. 그의 부친 정을육은 일찍이 무과에 올라 함길도 병마우후로 있었는데 이시애난 때에 전사하였다. 우후벼슬은 조선왕조 때 병영이나 수영에 속에 있었는데 병마우후는 쾌 높은 벼슬이었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여창이 8살 때) 학업에 전념하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5경을 밝히고 성리의 깊은 위치를 연구하며 채용(體用) 의학을 구명하여 경명수행(經明修行)으로 알려졌으며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1490년(성종 21년)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보직되었고 뒤에 시강원설서에 옮겨 동궁을 보도했으나 질시 되어 안음 현감(安陰縣監. 현 안의면)으로 이임되자 향리 자제를 훈도하여 사사(師事)하는 수가 적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귀향지인 종성(鐘城)에서 죽었다.
그 후 중종 때에 정몽주. 김광필과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의정부 영의정에 추종 되고 문묘에 종사하였다. 일두 선생의 묘는 함양군 수동면 동구마을 성안사 옆에 있으며 조선 시대 때 창건한 남원서원(1552년. 명종 7년)은 선조 40년에 임금이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정여창, 정온, 강익과 함께 제사를 올리고 있다. 1480년 조선조 성종은 성균관에 어명을 내리기를 평소 경서를 구하고 행실을 닦은 사람을 천거하라 했다.
당시 지관사였던 서거정은(徐居正)은 서슴지 않고 첫 번째의 이름을 정여창이라고 썼다. 명나라 사신 장영이라는 사람이 우연히 정 소년의 관상을 보고 그의 관상에 남달리 감복했다고 한다. 자영은 이때 정 소년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바로 여창(汝昌)이란 이름이었다. 여창은 ‘너는 어김없이 집을 번창하게 하리라.’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정 여창은 성리학의 대가, 왕도정치의 실천 주민복지 향상을 지양했던 대학자였다. 안의면은 현재 행정구역상 함양군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함양·거창과 대등한 지위를 가진 현으로, 본래 이름은 ‘안음’이었다.
안의면 소재지 입구에 있는 광풍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짜리 2층 누각으로, 태종12년(1412) 안의 현감 전우가 선화루라 하였던 것을, 세종 7년(1425) 김홍의가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으며, 성종 25년(1494) 정여창이 현감으로 부임한 뒤 중건하여 광풍루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선조34년(1601)에 복구하였고, 숙종9년(1683)에 중건하였다. 영조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중 인물화에서는 당대 제1인자였던 조영석(관아재,1686-1761)이 안음 현감 시절에 중수하고 현판도 그의 글씨이다.
봉산리 봉산에 조선조 오현으로 추앙받는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1583년 고을 선비들이 용문서원을 세웠다. 지금 '용문서원'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사당비가 남아있다. 서하면 봉전리 봉평에 군자정(君子亭), 용추사계곡 매산나 소(召)에는 선생의 호를 딴 ‘일두어’란 민물고기가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선생는 자연을 벗삼아 여유를 즐기기도 하였다.
선생의 저서는 ≪용학주소傭學註疏≫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에 불타고 정술(鄭術)이 엮은 ≪문헌공 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해지고 있다. 정몽주. 김굉필 등과 같이 우리나라의 도학의 종(宗)으로서 남들이 알아주지만 조금도 세상 사람들의 돋보임을 받고자 하지 않았던 진정한 선비인 그는 참된 효자임에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