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이 뽀얗게 핀 곳에서 어쩌다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다. 한참을 왁자지껄 하며 이러쿵 저러쿵 세상사는 이야기를 제멋대로 그러나 자신의 생활철학 잣대와 삶의 경험이 있는 대화 아닌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체중을 줄이려 밖으로 나온 순간 나는 환상적인 정경에 그만 매료되어 멈쳐섰다.
취중이라 그런가. 한밤 중의 배꽃이 깊어가는 봄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데 너무도 요염하고 애처롭게 빛을 발하고 있어 그 고혹적인 아음다움이 차라리 슬퍼보였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며 달빛이 서리는 것이 마치 이화에게 한껏 정기를 보내고 있는 듯 했다.
문득 시조 하나가 아련하게 스치운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아아! 정년 오늘밤은 잠을 쉬 이를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어느새 고려 문신 이조년이 되어 그의 심장 속을 헤매인다. 백꽃이 환하다 못해 농염함을 한껏 풍기고 있는데 그 배꽃 위에서 달빛마저 화합하듯 더욱 빛을 발하고 은하수는 무리지어 흐르는 깊고 깊은 봄밤에 정염(情炎)을 품고 있는 나뭇가지의 속마음을 두견새도 알 리 없지만 임 그리는 마음 이토록 깊어 병을 앓듯 잠못 이루고 뒤척이는 사모의 정!
혹시 삼경은 한 삼년 정분의 세월이 아니었을까? 삼경이 다 지나는 시각에서야 일행과 헤어져 길 담모퉁이로 들어서자 라일락 향이 나를 마중한다. 아아 좋다! 라일락향의 이 싱그러움이 좋다! 순식간에 몸과 마음이 청량해지며 행복해진다. 아마도 이 라이락향이 사라질 무렵이면 달근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봄꽃 축제의 끝자락을 장식하겠지!
아쉽다. 흘러가버리고 있는 또 한해의 봄날들이…. 난 아카시아 꽃향기에 취하려 아카시아 군락지 동산으로 갈 것이다. 청하 한 병 맥주 세 병 그리고 리베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