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마음은 보일까. 그럼 마음이 용심(用心)일까? 법정 스님의 설법을 요약해 놓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스님은 절에서는 ‘마음을 닦는다.’라고 말씀하는데,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적절한 표현은 ‘마음을 쓴다.' 즉, 용심입니다. 용심이 곧 수행입니다.”라고 강조하시면서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져놓았다.
스님의 표현을 빌린다면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보이지도 않은 마음을 ‘쓴다.’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용심이다. 용심은 수행이다? 했다. 어디에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답을 얻을까, 스님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기껏 내가 알고 있는 마음이란 흔들리는 갈대 같은 것이라 여겼다. 이것은 다분히 중심이 없어 보이는 너와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을 꿰뚫어 볼 수만 있다면 세상은 깨끗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마음은 보이지는 않으나 수행에 따라서는 보이기도 한다는 말로 들린다.
사람들은 이것을 함부로 다루고 소홀히 다룬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것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흔들리기도 한다. 이익을 좇아서 아니면 양심을 팔아가면서까지 자신을 혹사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직껏 이것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려본다고나 할까, 어떤 고수는 마음을 가슴과 눈빛으로 알아내는 비책이 있다면서 자랑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고 값어치가 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또한, 스님은 “마음을 쓰는 일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한다.” “대인관계를 통해 현재의 자신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때마다)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살펴보라.” 하시면서 법회에 모인 대중들에게 충고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정성스럽게 마음 쓰는 것, 즉 용심에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대상과 사람에 따라서는 용심도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 옳을 성싶다.
세상은 물질과 정신이란 바탕 위에서 상호 간에 서로 부족분을 보충하고 보완하면서 유기적인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 둘 중, 어느 것이 우선시 되고 더욱더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라는 논리로 접근한다면 옳지 않다고 본다. 두 영역에는 마음이 다 내포되어 있다.
어떤 대상, 어느 사물을 놓고서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을 보기도 하며, 같은 대상을 놓고서도 극과 극이란 판이한 해석과 결과로 나타난다. 옹졸한 마음은 부정과 분노를 낳고, 너그러운 마음은 긍정과 웃음을 낳는 법, 따라서 용심에는 행복이 열릴 수도 불행이 열릴 수도 있다. 스님의 지혜가 담긴 용심 앞에 마음이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