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떠나자 아무리 지난 삶의 인연들이 스치고 지나간 미련을 들이대며 옷깃을 붙들고 말려도 뿌리치고 떠나버리자
어릴 적 기억이 가물거리는 이별도 있지 않은가 동구 밖에서 큰 꿈을 안고 대처로 떠나는 내가 못 미더워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자꾸만 돌아보던 할머니, 어머니의 눈물
이제 머리에 서리가 내린 지금 그때보다는 가볍게 떠나자 어느덧 철심처럼 뿌리내린 옹고집의 버릇과 관습으로 새로운 것들을 밀어내려는 판에 박힌 일상들의 안락한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통스러운 순례의 길이라도 미련 없이 떠나자
방황하던 회색의 도시에서 외로움의 끝에 만난 여인과 나눈 사랑은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한 포도주처럼 목구멍을 간질이고 소박맞았던 말초신경들을 즐겁게 하며 망각의 꿈속으로 달려가던 지난날들
하지만 어느 새벽 동터오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그대의 모습에 정신이 나갔던가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영원한 정원의 꽃과 나무 그리고 생명수가 흐르던 시냇물 나뭇가지 위에서 천사의 노래를 부르던 금빛날개의 새들 일곱 빛깔 무지개가 피어오르던 언덕위의 하늘 그 빛나는 집에서 만났던 당신을 처음 본 듯 망연히 바라본다.
그렇구나 먼 옛날 아비와 어미가 배반의 칼을 들이대며 불확실한 미래의 노동의 고통을 위해서 당신이 대가 없이 주었던 선물 낙원을 떠났었구나
이제 떠나야 하는 것은 당신도 아비와 어미도 아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내 마음에 깊이 또아리 틀고 있는 나의 사랑스러운 괴물들 한시도 내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또 하나의 나의 분신들에게 이별의 눈물을 흘리자
이 과격한 작별의식이 없이는 나는 치욕스러운 일상의 무덤 속에서 먼지처럼 죽어야 하기에 달콤한 분신들이 내미는 손들을 물리치고 다시 한 번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