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잊어야할 것이 있는가 하면 잊어서는 안될 일이 있다.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 중에 개인의 이해관계로 생긴 오해나 사건들은 잊어야하지만 공동체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나 역사에 관한 일들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의도적으로 묵살할 경우 후세들에게 거짓을 전해주는 우를 범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교훈을 남겨 줘야할 의무와 책임을 망각한 처사가 될 수 있다.
역사란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과거실태, 특히 뿌리와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므로 과거의 있었던 일을 참고함으로써 그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밝히는 것이므로 과거의 있었던 일을 참고함으로써 그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위한 배움을 얻어 닥쳐올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장 포천은 건국이래 계속되어진 정치적 풍토는 야당성향 보다 여당성향이 두텁게 뿌리 내려진 곳이다.
해방 후 초대국회가 구성될 때부터 자연스럽게 여당인 자유당후보 서정희씨가 당선되었고 다음국회에서도 여당후보 윤성순씨가 경쟁을 쉽게 물리치고 당선된 후 4․19혁명이 있을 때까지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당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부정과 비리, 또는 부정선거 때문에 국민의 저항을 받아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여당이 괴고 따라서 여당의 공천을 받은 김영구 후보가 외지인인데도 불구하고 당선되어 포천출신 국회의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여당으로 집권은 하였으나 정국이 안정되기보다 혼란과 무질서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국민은 물론 젊은이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남북협상을 주도하겠다는 외침이 도를 넘었으나 당국이 이를 일관성 있게 저지하지 못해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 이유는 여당인 민주당이 신파 구파 분열되어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따라서 정치인들에게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를 기회로 이번에는 5월 16일 미명을 기해 젊은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군사혁명을 단행하는 일명, 5․16혁명(군사쿠테타)이 일어나 이 나라 정권을 군인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군정이 계속되는 동안 불합리했던 조직이나 체제, 부정으로 얼룩진 제도, 침체의 숲에서 허덕이던 산업 등에 대한 수술을 가하고 약속된 혁명과정을 마무리하면서 민정이양절차를 서둘게 된다. 따라서 입법부를 구성하기로 선포하고 정당의 창당절차를 밟게 된다.
창당 과정에서 여당은 당연히 군 출신이 중심을 이루었고, 야당은 신구 정치인들이 중심을 이루어 각 정당이 창당작업을 서둘러 정치 일정은 급 물살을 타게 된다.
창당된 대표적인 정당은 민주공화당(공화당) 총재 박정희, 신민주당(신민당) 총재 윤보선으로 당이 정비되면서 각 지역마다 후보를 공천하여 지방조직을 강화해나갔다.
이때 포천의 선거구는 가평을 포함해 두 개의 군을 한 선거구로 묶어 놓았다.
그래서 여당인 공화당에서는 이동면 출신의 김용채(당시 중위)씨를 후보로 출마시켰고 신민당에서는 가평출신으로 민주당 시절 내무장관을 역임한 홍익표씨를 후보로 내세워 선거전에 돌입한 결과 신민당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이 포천 역사상 처음으로 있었던 야당후보의 당선이다.
그 다음 선거에서는 여당인 공화당후보로 오치성씨가 출마하여 무난하게 당선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 4선 의원으로 내무장관을 역임하며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권좌에 머물고 있었다.
오치성 의원은 초창기부터 낙후된 포천지역을 위해 정부로부터 많은 예산을 배정받아 농촌의 도로 확장이나 교량건설, 공공 기관의 건설 등 많은 지역의 환경을 정비하는 일과 군민의 숙원사업을 해결해 주었다.
그 보다 더욱 공로가 인정되는 것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던 사실이다. 취업난이 극심했던 당시 경찰 공무원, 그 밖에 정부 각 부처에 골고루 자리를 확보할 수 있게 동분서주한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서울로 진출하여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철저했던 포천사랑은 포천여자 종합고등학교의 개교에 관한 그의 순수했던 노력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오치성의원은 그 학교를 자기가 뜻만 있었다면 이사회를 구성하여 사립학교로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립학교로 설립을 추진했던 사실은 단적으로 그에게 사심이 없었던 것이라고 인정해야한다. 이렇게 많은 공로가 있었음에도 그에게는 숨겨진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 자란 고향은 황해도이고 월남하여 자리 잡은 곳은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군이라고 하는 방대한 조직 속에 일원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포천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고 자라지 않은 포천의 민심에 늘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만회하기 위한 방법으로 포천출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과 노력을 퍼부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참모는 사무국장 유○○, 비서관 김○○씨 그리고 그와 동향인 도립병원사무장이었던 이○○씨가 중에 측근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이중에 비서관으로 있던 김○○씨는 포천고등학교 출신이면서 포천에 토박이로 자라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포천 젊은이들의 성향과 사정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관계로 오치성 의원의 약점을 옹호하기 위해서 포천 출신들이 모이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저곳에서 모이는 고향인들 모임에서 오치성 의원에 대해 배타적인 여론이 형성되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모임을 제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항의 형태로 굴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으므로 극기야 압력과 회유로 방해하기 시작한 것으로 인식해야한다.
서울은 전국 각지에 고향을 둔 인사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에 고향에 따라 각종 모임이 흔한 곳이다. 그런데 유독 포천군만은 재경인들의 수가 엄청나게 분포되어 있으면서도 10수년간 모임을 체념한 상태로 고향을 방치하고 있었다. 혹 모임을 가지게 될 경우도 모이는 사람들의 인적사항과 모이는 수를 비서관에게 사전에 알려주어야 뒤탈이 없을 정도였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공공기관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지역구 의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함으로써 진급이나 신상에 불이익이 다가올 것을 염려하여 신변보호차원에서 모임에 적극성을 취하지 못했다고 본다.
간혹 동창생이나 같은 면 출신들끼리의 부분적인 모임을 주선했을 경우 참석했던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로 다음모임에 누구누구도 함께 나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가지만 다음모임에 나갔더니 허종무, 이해면, 정동화 등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친구들이 나와 있었다.
이들이 만나자는 용건은 포천출신 교육자 모임을 주선하자는 내용이었다. 왜 교육자만의 만남이냐고 반문했더니 권력의 힘이 덜 미치는 분야가 교육계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여기서 그럴 것 없다고 했더니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강조하였다. 모임에는 반드시 핵심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 번 모임에는 각자가 가장 신뢰하는 한 사람을 추천, 동참하면 모임을 유지하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제안했더니 이에 모두 동조하였다. 그 밖에 많은 문제점을 의논하고 다음달 모임 날짜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한달 후 모임에는 약속한대로 한사람씩 동행하였으므로 15명(양흥식, 박한범, 유기로, 이기수, 이준영, 진두봉, 이해완, 이일훈) 등이 함께 모이게 되었다.
이때는 모임의 장래를 위해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명칭을 재경 군민회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자극을 줄 필요는 없으므로 내용은 군민회고 표면적으로는 향수가 있는 명칭으로 선택하기로 했다.
그러면 다음 모임에서는 회칙과 명칭을 확정하자는 안건을 다루기로 했고 , 다음달 모임에도 마찬가지로 오늘 모인 회원들이 각자 가장 신뢰하는 한사람을 추천 동참하기로 하고 회칙초안을 본인에게 일임하고 산회하였다.
이번 모임에는 30명 가깝게 모였다. 때문에 정식으로 창립총회로 개회할 것을 선언하고 임시 의장으로 본인을 추천하여 회칙 안을 심의하게 되었다. 회칙은 몇 개 문맥을 수정하고 명칭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는 뜻에서 포천 향심회(抱川 鄕心會)라 정하기로 하였다.
규정에 따라 임원 선출은 회장 박광철, 총무 이석보를 선임하고 여러 가지 문제점을 자유토론하고 회의를 마무리 하였다. 한 회원은 지금은 포천인들이 모임을 주선하기에 가장 어려운 시기이므로 이 난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서 활성화시켜주기 바란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모이는 횟수가 거듭되고 숫자가 늘어나게 되자 어김없이 검은 손에 의한 방해 공작은 유선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모임을 계속할 수 없게 하는 일은 전화 한통으로 충분했었는데 이번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모양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에게도 연락이 와서 비서관을 만나 모임에 대해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에게 너무 과잉으로 대처하는 것 같으니 염려할 것 없이 그냥 내버려두라고 부탁한바 있다. 그 후에도 정보는 다양하게 들려 왔으나 모임은 더욱 활성화되어갔다.
그런 가운데 요직에 있는 분들이나 권력기관에 있는 분들은 포천 향심회를 경원시한 것 같았다. 그분들에게는 그와 가까운 사람을 보내어 수차 참여를 권해 보기도 하였으나 참여를 계속 회피했고 일부이기는 하난 오히려 불참하는 쪽으로 동조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나나기를 꺼려하면서 후원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당시 종로구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셨던 이범규 사장은 적극적인 참여는 물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분이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도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회원들의 성원에 힘입어 연말이 되면 서울시청 식당에서 3~4백 명씩 모여 “포천인의 밤”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아울러 행사장에는 포천의 기관장(군수, 경찰서장)과 유지들을 초청하여 함께 만찬에 참여하였으며 농촌지도소에 의뢰하여 우수하고 모범적인 4H청소년 모임을 추천받아 송아지를 기증하는 행사도 곁들였다. 때문에 포천인의 밤은 표현 그대로 고향을 떠나있는 포천인들 만이 모여서 오래 동안 풀어보지 못한 숙제를 해결하고 향수가 담긴 옛이야기를 나누는 담소의 자리가 되어 묵었던 고향소식으로 기쁨을 나누어 갖는 자리가 되기도 하였다.
대화 속에는 철없이 뛰놀던 산과 들, 냇가에서 벌거벗고 물장구치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밤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해마다 이날을 기억하게 되고 기다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2․12사태로 권력의 핵이 바꿔지면서 집권층도 새로운 인물로 물가리가 되었다. 이같은 정서를 배경으로 고향모임에 배타적이었던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어 새로운 모임을 발기하는 절차를 밟아 군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재경군민들의 구심점을 이루어 온 포천향심회의 그간의 노고는 완전히 묵살하고 오로지 권력의 그늘을 배경으로 군민회를 조직한 것은 지금까지 수고해 온 이들을 고의적으로 배제한 처사로 아쉬운 점이다. 그러므로 훗날 포천의 역사를 재조명할 기회가 생기면 그때 옳고 그름의 방향이 가려져야할 것으로 사료된다.
포천군민회의 전신이라고 하는 이유를 들고 있는 내용을 찾아보면
1) 현재 군민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로고는 향심회가 고안하여 사용하던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중앙부위에 향심(鄕心)이라고 쓰여 진 글자를 포천(抱川)이라고 바꿔 쓴 것뿐이다. 이 로고는 본인이 창안한 작품으로 창안과정에서 수정에 수정을 가해 장기간에 걸쳐서 완성된 작품이다.
첫째, 이 로고 속에는 포천전역을 포용하는 뜻( 한 원안에 각 면이 모양으로 나열되었음)이 있고,
둘째, 면마다 독립성을 강조하였고(독립된 공간을 만들어 자기면의 명칭을 분명하게 밝혔음)
셋째, 재경 포천인은 누구나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았다(각 면 명칭 하단부에 원으로 중심부를 이뤄 로고의 핵을 이루고 그 속에 고향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뜻으로 향심이란 글을 담고 있다)
2) 지금의 군민회 조직을 수월하게 진행 시킬 수 있었던 것은 향심회에서 이미 10수년에 걸쳐 매텬 면별로 재경인사들의 이름과 소재지 및 전화번호를 조사하여 수록한 수첩이 발간돼 있었기 때문에 각 사람에게 큰 어려움 없이 연락이 가능했다고 보아야한다.
3) 조직을 주선한 사람만 다를 뿐 구성원은 그 때 그 사람들이다.
그 당시 모였던 재경 포천인들의 바램은 재경 군민들의 모임을 주선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다. 그러나 모임의 명칭을 군민회라고 했을 때 찾아 올 압력을 극소화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내려진 결론이 포천향심회란 명칭이다.
향심회란 뜻은 고향의 향수가 담기고 고향을 늘 생각하는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재경포천 군민회와 동일한 뜻으로 생각하고 지어진 명칭이다.
이렇게 가시밭길 속에서 일구어낸 재경군민들의 모임을 외지인들이 만든 모임인양 왕따 시키는 행위는 고향이 같은 친지들 간에 취할 행위가 아니었다.
권력의 그늘을 찾았다고 해서 이를 묵살하고 오로지 군민회란 명칭을 표기해야만 포천인들의 모임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는 수긍하기 곤란하다.
창립당시 참여했던 많은 회원들은 어려웠던 시기에 압력을 뿌리치면서 포천향심회를 키웠고 또한 이를 중심으로 고향의 향수를 달랠 수 있었으며 애향심을 되살리는데도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다는 자부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재경포천군민회는 포천향심회가 어렵게 닦아놓은 텃밭에서 쓸만하게 자란 모종을 옆 고랑으로 옮겨 심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보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군민회를 운영하는 거싱 명실 공히 회원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침목을 돈돈히 하고 아울러 고향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사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