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나는 ‘고려장(高麗葬)의 굴레’라는 수필 한 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고려장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고향 집 앞 아카시아 밭이다. 아카시아 밭은 돌무덤과 크고 작은 아카시아 나무가 많다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이곳은 어릴 적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였다. 소먹이며 전쟁놀이하고 바위에 올라앉아 외가 자랑하고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았다. 간혹 토기를 주워 깨트리기도 하고 모양이 괜찮은 놈은 집으로 가지고 왔다. 진흙으로 만든 공작물 같기도 하고 투박해 보이기도 했다. 당시 집집이 토기 몇 점씩은 있었다. 꽃병모양, 사발 모양, 밥그릇 모양 등 다양했다.
어느 해 오랜만에 고향에 들르니 쓸모없던 땅 아카시아 밭이 한창 개발되고 있었다. ‘함양예술마을’이 들어선다며 동네 주민은 관심이 많다. 그러고 또 몇 년이 지난 2009년 12월 예술마을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함양군 내의 유일한 예술마을로 미술인들이 상주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공예, 유리, 판화, 동양화, 유화 등을 1년 내내 상시로 체험해 볼 수 있는 종합문화예술 공간이다.
이곳저곳 꼼꼼히 살펴보는 중 눈길이 가는 곳이 있었다. ‘송탄유굴 유적’이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는 2007년 5월 함양군 안의와 거창 마리간 도로 확장구간 유적발굴조사 결과 안의면 신안리 유적에서 일제 식민지배 당시 '송유 공출' 노역을 증명해주는 송탄 유굴 8기가 조사됐다고 최근 밝혔다.
일제는 1941년 8월 미국이 석유수출을 금지하자 진주만 공습을 강행했고, 이에 부족한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 국민을 동원해 관솔 따기에 나섰다. 지금까지 송진이나 관솔을 채취해 간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 적이 있지만, 가마를 통해 송유를 공출해간 실물자료를 확보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서 역사적·교육적으로 가치가 높다.”라고 밝혔다.
“송탄 유굴은 일제가 군수물자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한 기당 가로세로 각 4m가량이며 형태는 타원형이다. 소나무나 관솔을 넣고 열을 가하면 빗살무늬 같은 골을 통해 송유가 모여 대롱을 통해 옆에 있는 구멍으로 모이도록 설계돼 있다. 역사문화센터는 조선 시대 전통 가마가 긴 굴 모양으로 생긴 것과 비교해 볼 때 일제가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 일본식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함양 신안리 유적에서는 송탄 유굴 외에도 가야 멸망 후 신라세력이 이 지역에 진출한 후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실묘도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일제강점기시대 그들은 우리의 국토를 짓밟고 백성을 핍박하고 우리의 문화와 재산을 강탈했는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