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이는 정말 효녀인가? 요즘 초등학교 논술 책에 나오는 토론의 주제이다. 심청이를 효녀라고 하는 측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린 심청은 당연히 효녀라는 주장이고 효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가장 큰 불효이며, 부모님을 떠나거나 버리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모시는 것이 진정한 효라고 주장한다.
듣고 보니 둘 다 일리가 있는 듯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효녀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라고 하는 주장을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오히려 입장을 바꾸어 내가 만일 심청이의 아버지였다면, 내 딸이 내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그건 앞을 보지 못하는 아픔보다 몇 배나 큰 아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신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요, 불감훼상이 효지시야(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옛 선조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심청이는 큰 불효를 저지른 것이 된다. 결론은 심청이는 효녀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이런 불효막심한 심청이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일까, 그것도 불효녀가 아닌 효녀의 상징으로 말이다.
역장불여지장(力將不如知將)이요 지장불여덕장(知將不如德將)이라는 말이 있다. 힘 있는 장군은 지략 있는 장군만 못하고 지략 있는 장군은 덕 있는 장군만 못하다는 말이다. 이 덕(德)이라는 것은 결코 이성이나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비심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다. 희생과 봉사도 마찬가지다.
가령 생명부지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 뛰어든다거나,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거나,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납한다거나하는 이런 행동은 결코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비이성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행동을 듣거나 보았을 때 감명을 받는다.
우리의 마음에는 이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의 아버지인 프로이드는 마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고, 석가모니는 마음을 8가지로 세분화하여 설명하였다. 이성은 그 세 가지 중에 하나이고, 그 여덟 가지 중의 한 가지 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성의 역할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오히려 이성을 지배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행동은 우리에게 합리적인 판단은 가져다 주지만 덕성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성은 덕성을 잠재우려고 한다. 하지만 위대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성을 넘어서서 움직인 사람들이다. 상식적으로 움직인 사람이 아니라 상식의 틀을 깨고 나간 사람들이다.
귀감이란 본보기가 될 만한 언행이나 거울로 삼아 본받을 만한 모범을 가리킨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역사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귀감(龜鑑)에 두었다. 왜 그런가? 귀(龜)는 거북의 등을 위에서 본 모습으로 옛날 중국에서는 거북의 등을 불에 구워 그것이 갈라지는 균열을 보고 사람의 장래나 길흉을 점쳤다. 감(鑑)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보기 위해 대야에 물을 떠놓고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즉 살아가는데 어떤 행동이 길(吉)이 되고 흉(凶)이 되는지, 어떤 것이 아름답고 추한 것인지 알게 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재산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귀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귀감 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심청이가 불효녀가 되기도 하는 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귀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