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말미에 매년 그러하듯이 나는 투덜댄다. 이번 겨울은 정말 혹독했다고. 어느 해보다 더 춥고 눈도 더 많이 내리고 하필 구제역까지 겹쳐 온 농민들이 눈물을 자꾸만 터뜨리는 잔인한 계절이었다고. 애지중지 기르던 소들을 살처분을 해야 하는 농민은 커다란 소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보고 엉엉 목 놓아 울고 말았다고. 그것도 모자라 영동에 폭설로 농민들의 가슴을 짓밟았다고. 불평을 늘어놓자니 한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달력을 들여다보니 입춘도 지나고 봄은 어김없이 오고 있었다. 신은 공평하다. 오른 손으로 머저리 인간들을 마구 때리다가도 왼손에는 선물을 들고 있다. 인간들을 완전히 내치기에는 애처로운 데가 있는 모양이다. 오랫동안 철권정치에 고통을 당하던 튀니지와 이집트 시민들에게 자유를 선사하지 않았는가. 그동안 그들의 절망이 크게 느꼈기에 지금 그들의 기쁨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1월 초에 태국에 다녀왔다. 한국의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 터라 그곳의 더위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거리 카페에서 태국 풍경과 경치를 즐기며 때때로 수첩에 시 구절을 끄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한국의 추위가 너무 고통스럽다고 불평하였는데 태국에는 달콤한 더위를 주고 있었구나. 추운 계절에 더운 나라에 여행을 하는 것은 일종의 유익한 나눔이 되겠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신은 어떤 자는 부자로 어떤 자는 가난한 자로 만든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신이 자기를 버렸다고 불평한다. 무신론자나 염세주의자들은 종종 신에 대해 냉소한다. 신이 있다면 왜 모든 창조물들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 모두 행복하게 하지 않는가. 필자는 신의 유무에 대해 논의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이렇게 답변하고 싶어진다. 신은 인간에게 나눔의 역할을 줌으로써 행복의 주체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라고. 신은 인간에게 나눔의 지혜를 주어 그 기쁨을 누리도록 베풀어준 것이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다. 벌써 버들강아지가 하얀 솜털이 달린 새싹을 살포시 감추듯 내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봄은 기온으로부터 오기 보다는 마음 속에 싹을 틔운다. 이 긴 겨울을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들을 생각해내고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 봄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더 많이 가진 자는 좀 더 베풀고, 그렇지 못한 자는 작게 베풀면 된다. 우리 속담에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작은 물질이라도 나눔을 통하면 사회의 온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급속하게 다문화사회로 변화되어가는 한국은 나눔의 실천이 더욱 필요하다. 생소한 곳에 와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사회의 편견으로 한국의 겨울이 더 춥게 느껴진다고 실토하고 있다. 국제결혼으로 시집을 온 동남아 여인들은 언어소통도 안되고 한국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고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그들의 한탄을 들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아량을 보여야 한다. 봄이 오면 그들이 진정한 봄을 느끼도록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마음의 겨울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우리가 나누어주는 봄의 온정이 더욱 달콤할 수 있다. 그래야 다문화사회인 한국이 드디어 ‘우리나라’라고 소리치며 기뻐할 것이다. 필자는 태국여행에서 태국여인에게 받은 친절을 소재로 ‘우정’이라는 시를 지어보았다.
타이 여인 누안의 초청으로 강가 식당에서 대접받는 저녁식사
한국을 여행할 때 홈스테이와 가이드를 도움 받았던 추억을 우정으로 더 키워서 여행에 지친 한국친구들에게 나눔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따뜻한 친절
강물에 비친 달빛과 맑은 누안의 눈빛이 만나서 부처의 자비를 향하다 피우는 연꽃
작별이 아쉬워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냥 손을 흔드는 누안
누안이여, 그대는 사람과 사람이 인종과 인종이 나누는 교류의 만남을 통해 권력자의 국경을 넘어 가슴을 여는 불심의 꽃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