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되면 보훈의 달이고 현충일이며 6.25사변 기념일이 있다. 그런데 6.25란 골육상쟁을 겪어 본 사람과 전후세대와는 생각하는 자체가 다르다. 6.25를 겪었던 사람들은 6.25라면 먼저 피비린내 나고 비참했던 그 참상부터 눈앞에 어린다. 그러나 전후세대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교과서에서만 보는 먼 옛날에 어느 싸움같이 생각하기에 한집에 같이 살면서도 6월을 맞는 감회는 서로 다른 것 같다. 이런 것을 보고 동상이몽이라 하리라. 세계 제2차 대전 후 우리는 왜놈들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은 되었으나 한반도를 38선이란 금을 그어 놓고 자유진영에 미군과 공산진영에 소련군이 점령하여 한나라를 두 체제로 만들고 냉전이 계속되었다. 북한에서는 광복 후 1946년 2월부터 소련군정하에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토지개혁등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굳혀 나갔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식민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산업이 마비되어 버린 이후 1950년 제2차 총선을 치른 결과 여당인 자유당이 56석이고 한국 민주당을 위시한 의석이 154석이 되니 정당정치의 혼란이 야기되어 정부와 국회의 대립과 농지정책의 실패로 농민들의 빈곤이 가중되었으며 공비들의 준동으로 사회질서 혼란에 빠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미 국무장관이던 “에치슨”(D.G Acheson) 이 한국을 태평양 방위선에 제외한다는 설이 유포되고 국내에서는 “양키 고홈”을 외쳐대니 북한으로서는 무력남침의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일찍부터 남침준비를 하여 오던 북한은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고 소련으로부터 중화기를 구입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도 이를 위장하기 위해 남북협상을 제의하였다. 1950년 6월25일 북한공산군은 20만의 병력과 3개 전차사단을 이끌고 38선을 넘어와 남침을 강행하였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노후한 무기와 보잘 것 없는 장비로 무장한 국군은 6월28일 서울을 내주고 이어 낙동강까지 후퇴했으니 당시 수도는 대전, 대구, 부산 등지로 옮겨 다녔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아마도 지금의 영중면에 있는 38휴게소 아래 다리 및 개울에서는 장사꾼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모양이다. 당시의 38선에는 아무 장애물도 설치되지 않고 군인보다는 정보원이 나가 있었다. 화폐가 서로 다르니까 물물교환을 하는데 북에서는 북어가 주로 나오고 남한에서는 고무신과 마이신, 다이아지논 등 약품이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6월23일 자고 일어나니까 개울가에 북어더미가 쌓이고 포장으로 덮어 놓았으니 장사꾼들은 북어더미인줄 알고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북어더미는 6월25일 새벽에 유유히 움직여 나오지 않는가? 북어더미로만 알았던 그것은 위장해 놓은 탱크였다. 그렇게 정보에 어두웠으니 수도 정부가 부산까지 쫓겨 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1950년 6월25일은 일요일이었다. 군인들은 외출을 나갔고 날씨는 잔뜩 흐려 가랑비가 내렸다. 농촌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라 일손이 부족하여 새벽부터 논, 밭으로 헤매는데 천둥소리인양 쿵쿵 소리가 나더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38선으로 두 동강이 난 우리 포천은 포천읍 에서 38선까지 약 10㎞ 밖에 되지 않는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38선 기슭 개울가에 북어더미로만 알았던 그것이 위장을 벗고 유유히 움직여 38선을 넘어오는 것이 아닌가. 무방비 상태일 뿐 아니라 마침 일요일이라 일부 외출을 하였고 나머지는 늦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이었다. 탱크는 천천히 움직여 남쪽을 향해 나오는데 저항하는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양문을 지나 만세교에 이르기까지 포 한번 총 한방 쏴보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의 탱크는 위세도 당당하게 굴러 나온다. 당시에 우리의 전방부대가 지금의 포천 종합고등학교 자리에 주둔하여 있었고 무기라고는 75㎜ 박격포가 제일 큰 무기라고 들었다. 당황한 나머지 긴급출동 하여 신북면 사무소를 지나 산기슭에 75㎜박격포를 설치하고 정조준을 하여 탱크를 향해 쏘았으나 정통으로 맞기는 하였으나 ‘움찔’하더니 그대로 굴러 나오는 것이었다. 대항하려 해도 대항할 무기가 없었다. 탱크는 신북면사무소를 지나 포천에 다다랐다. 포천경찰서에 이른 시간이 09:30이었고 누구하나 대항할 도리가 없었다. 10시가 되니 국기게양대에는 인민공화국 국기가 달리고 유치장 문이 열려 죄수들이 전부 풀려 나왔다. 깜짝 놀란 주민들은 부랴부랴 피난보따리를 챙겨지고 피난길을 떠났다. 포천사람들의 제1차 집결지가 청량리에 있던 서울대학교 물리과 대학이었다. 6월26일 의정부에 이르니 동두천에서 나오는 군인과 합세하였으나 서울로 향하는 탱크를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용감한 우리 국군 용사들은 수류탄을 들고 지나가는 탱크에 기어 올라가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투척하여 몇 대의 탱크가 망가졌다. 의정부에서 대항하던 우리 국군들은 다시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하였으니 6월27일 서울을 사수하겠노라고 미아리에서 반격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방송에서는 여전히 승전한다고 서울 시민들을 위로하였으나 6월28일 아쉽게도 수도 서울마저 북한군에게 넘겨 주었다. 유비무환이라 했던가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싸움, 권력싸움, 자리다툼에 세월을 보내고 전쟁이란 생각조차 못하였던 것이다. 25일부터 29일 사이에 3일간 의정부에서 서울 사이 그리고 포천에서 의정부사이에 도로주변의 참상을 그대로 적어 본다. 제일 눈에 띄었던 것은 밭고랑에 태극기로 덮어놓은 시신이었다. 아마도 국군장교인 듯 했다. 그 옆에 다른 흰 보자기로 덮어 놓은 시신 한 구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는 엎어져 죽은 사람, 꼬부리고 죽은 사람, 어느 사람은 개울가에서 배를 총에 맞은 듯 개울물에 둥둥 떠 있었다. 아직도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는 모습은 엄마는 총탄에 맞아 쓰러져 죽었는데 등에 업힌 어린아이는 목이 쉬도록 울어대니 그 아이를 누가 어떻게 보살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포장도 안된 자갈 깔린 도로 위에 쓰러져 죽은 시신위로 그 무지무지한 탱크가 그대로 수 없이 지나가 사람의 형체도 없이 기름을 뿌려놓은 듯 그림이 그려진 그 자리에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후 9.28 수복이 된 후에 가두어 놓고 고문을 하던 남한의 선량한 시민들을 전선으로 10명 혹은 20명씩 한번에 엮어다 참호 옆에 세워놓고 총을 쏘아 호 속에 멋대로 쓰러져 죽은 시신들은 차마 눈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 부모형제를 잃은 자식이나 형제들, 처음에는 시체를 찾기 위해 눈물을 흘리고 철사 줄을 끊으며 뒤적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시신이 썩어서 자기 식구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몸의 특징이나, 입고 나간 옷으로 구분을 하고 시신들을 찾아가니 처음에는 통곡을 하였으나 나중에는 눈물마저 마르고 악에 바친 유족들은 시신이라도 찾으려 여기 저기 으슥한 골짜기를 찾아 다녔다. 나도 그 중에 한사람이었기에 지금도 그 광경이 생생하다. 우리가 겪은 전쟁이란 이렇듯 몸서리 쳐지도록 무서운데 우리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전후세대는 교과서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먼 옛날의 전쟁에 역사의 한 토막으로 생각하니 같은 한 집에 살면서도 생각이 너무나 차이가 난다. 6.25 사변으로 인한 포천군의 인명 피해만 하더라도 사망 1,255명, 납치232명, 행방불명47명, 부상315명, 계 1,849명이며 주택은 전체 10,367호에서 파손이 5,744호 이니 반수이상이 파손이나 소실되었다. 이와 같은 피해도 문제이지만 우리는 남북통일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이 있겠으나 그러나 전쟁만은 이 땅위에서 다시 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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