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귀양살이 정약용을 아끼던 정조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정조의 둘째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조선의 23대 임금 순조 임금인데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영조의 왕비였던 증조할머니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러나 정순황후 친정 측 사람들은 정약용과 반대 입장에 있어서 정약용이 속한 남인을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1801년 천주교를 믿는 자는 모조리 잡아들여 극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 죽거나 옥에 갇히었다. 이것을 '신유사옥'이라고 한다. 이가환, 권철신 등이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었으며, 셋째형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 이승훈, 홍낙민 등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이때 좌의정이 된 서용보는 정약용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은 살려 주자고 하였다. 다행히 정약용과 둘째형 정약전은 목숨을 구했다. 천주학을 젊었을 때 믿었다가 그때는 안 믿었는데, 그런 그를 차마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귀양을 갔다. 정약전은 사위인 황사역은 충청북도 제천의 산속으로 도망을 가서 굴속에서 신도들과 숨어 살다가 주준모 신부의 입국에서부터 신유 사옥까지의 천주교 박해 내용을 명주 천에 백반으로 자세히 썼다. 백반으로 글씨를 쓰면, 그 천을 물에 넣어야 글씨가 나타난다.
황사영은 그 천을 동지인 황심을 시켜 청나라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알려 청나라의 도움을 얻으려 하였으나 중간에 발각되고 이 일로 인하여 황사영, 황심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처형 되었다. 이 사건을 ‘황사영 백서’라 일컬으며 이 일이 있은 후, 한층 더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다. 황사영이 정약전의 사위이므로 정약용, 정약전에 대한 의심도 깊어졌으며, 홍락인, 이기경 등은 정약용 형제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사형당하기 위해 귀양지에서 끌려왔다.
그때, 정일환이라는 황해도 사람이 한양에 왔다. 곡산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진정서를 내 놓으며 정약용을 죽여서는 아니 된다며 간청하였다.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있을 때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여, 곡산 사람들은 정약용을 지금도 부모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귀양지에서 누구와도 만난 일이 없으며, 황사영이 정약용의 조카사위지만, 아무 관계가 없으니 그를 죽여서는 아니 되며, 지금 천주교를 믿지 않는데, 모든 것은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함일 뿐이니 굽어 살펴 달라며 울며 애원하였다.
그의 강력한 주장에 정약용을 죽여야 한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끌려온 지 열흘 만에 겨우 목숨만 살아 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다시 귀양살이를 떠났다. 형인 정약전이 귀양지인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은 강진의 초라한 초막에서 글만 읽으며 세월을 보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르침을 받고자 고을의 젊은이 몇 명이 찾아와 정약용에게 스승이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무슨 가르침을 주겠소." 정약용은 한 마디로 젊은이들을 거절하였으나 사람들은 물러가지 않고 계속 졸랐다. 이같은 일이 계속되자 조그만 방에 동네 사람들의 청에 따라 서당을 차렸다. 귀양살이를 사는 죄인의 몸이기에 서당보다는 조그만 마을의 글방이었다.
언제 귀양살이에서 풀려날지 모르니 백성들을 위해 글이라도 가르치기로 다짐한 정약용은 열심히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동네 사람들에게는 백성으로서 할 일과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설득했으며, 틈만 나면 시를 짓고 책을 읽었다. 책은 근처에 있던 조그만 절에서 빌려다 읽었다.
강진으로 온 지 8년째인 1808년, 윤박이라는 사람이 마련해 준 조그만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집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동의 다산이라는 산 밑에 있었다. 그 곳으로 이사를 온 정약용은 기거했던 작은 산의 이름을 따서 자기의 호를 다산이라고 지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무엇인가를 남기고 죽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을 하였으며, 귀양살이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한다. 이때, 백성들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들에게 필요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정약용은 아이들에게 글공부 시키는 시간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하였으며, 시를 짓는 일을 중단하고, 책을 쓸 준비를 하였다. 그래서 밖에 나오는 일이 점점 줄었으며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깊이 생각하고는 붓을 잡아 글을 썼다. 가끔 동네 사람들이나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이 찾아오기도 하였으나 정약용이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방해 될까봐 좀처럼 찾아오지 못했다.
정약용은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끌어내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정치와 경제에 관한 자기의 생각도 글로 적었으며 법률과 군사에 관한 글도 썼다. 그밖에 여러 분야에 걸쳐 자기가 생각한 것을 글로 옮겼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책이 경세유표이다.
쉰여섯 살 되던 1817년에 완성되었는데 그가 귀양지에 온지 17년 만이었다. 이 책의 내용은 국가제도 개혁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책의 분량은 모두 40권이나 되었으며, 경세유표를 쓰는 틈틈이 대학회의, 맹자요의, 민보의 등의 책을 썼다. 목민심서 쓰기에 열중하여 일 년 만에 1818년 목민심서 48권을 다 쓰기도 하였다. 1818년 8월 길고 긴 18년의 귀양살이가 풀려나게 되었다.
이렇게 다산 정약용은 고향인 마재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한참 일할 나이를 귀양지에서 모두 보냈지만, 그래도 몇 권의 책을 완성하여 헛된 세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고향에 온 이듬해에 흠흠심서 30권을 쓴다. 이렇게 그가 일생에 쓴 책이 500권이 넘으며 지은 시가 2,460편이나 된다. 고향에 온지 18년이 흐른 1836년 2월 22일, 다산은 75세를 일기로 그 한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