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계문신으로 뽑힌 해 정약용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전하기 위해 한강에 놓을 배다리를 설계하라는 어명을 받는다. 당시 조선에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없었다. 배다리는 수십 척의 배를 강을 가로질러 사슬로 엮어 만든 임시 다리로 배 위에 가교를 건설해 마차와 말을 비롯한 수많은 인파가 편하고 신속하게 건널 수 있었다.
정약용은 뚝섬에 배다리를 놓아 사도세자의 유골을 옮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때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1795년 대규모 왕실의 행렬이 수원을 방문할 때 정약용은 공사기간을 대폭 단축해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는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이 배다리로 말779필과 인원 1779명이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약용의 업적 중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수원 화성 축조이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을 건설하기 위해 서양의 학문에서 과학을 도입해 거중기를 만들어 당시 최첨단 성곽기술을 수원 화성에 적용했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 때 참고한 책은 ‘기기도설’(器機圖說)이었다. 기기도설은 명나라로 귀화해 등옥함이라는 이름을 얻은 스위스 과학자 요하네스 테렌츠가 지은 과학책이다. 서양 물리학의 기본 개념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각종 장치가 수록되어 있었다.
12개의 도르래로 이뤄진 거중기를 이용하면 장정 한 사람이 240kg의 돌을 거뜬히 들 수 있었다. 화성 축조에는 거중기 외에도 많은 기계 장비가 사용되는데 짐을 싣는 판이 항상 수평을 유지하는 ‘유형거’를 만들었고, 도르래와 물레를 하나씩 사용해 만든 작은 거중기 ‘녹로’, 소가 끄는 수레인 ‘대거’ ‘평거’ ‘발거’가 쓰였다. 기록에 의하면 거중기는 한 대만 쓰였지만 유형거는 11량, 녹로는 2개, 수레는 200량 넘게 쓰였는데 이로 인해 수원 화성의 공사 기간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
수원 화성은 기존의 성곽 체계를 탈피한 당시 최첨단 방어요새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성벽을 타넘던 전투가 화포로 성벽을 부수는 전투로 양상이 바뀌었고 수원화성은 화포 공격에도 끄떡없도록 설계되었다. 일단 높이가 낮아 화포 공격으로 하단이 일부 무너져도 성벽 전체의 무게를 버틸 수 있게 하였고, 흙, 돌, 벽돌이 적재적소에 위치해 화포 공격으로 성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도록 설계했다. 화강암을 사용해 돌이 화포 공격에 쉽게 깨지는 단점을 보완했고, 돌 뒤에는 흙벽을 쌓아 충격으로 돌이 빠지는 문제를 방지하여 지금도 관계자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정약용의 삶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정약용은 천주교를 주로 신봉하는 남인에 속해 있었다. 그가 천주교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노론 벽파는 이 일을 구실 삼아 정약용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정약용이 계속 공격을 받자 정조는 정약용을 황해도 곡산 부사로 발령한다. 잠시 조정을 떠나 백성을 직접 돌보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과거 천연두로 자식 셋을 잃었던 정약용은 곡산 부사로 일하며 천연두 치료방법을 연구해 ‘마과회통’을 썼다.
그 후에 조정의 당파 싸움을 피해 고향에 내려가 있던 정약용은 정조가 승하한 뒤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는데 그는 그곳에서 ‘목민심서’ ‘아방강역고’ ‘경세유포’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책을 집필한다. 특히 흠흠신서에는 과학적 부검법이 나오는기도 하는데 정약용은 “독살을 밝히려면 사체에 은침을 꽂아 색변화를 살펴보거나 사체의 입에 넣어둔 밥을 닭에게 먹여 생사 여부를 관찰하였고 혈액이 응고하는 현상과 검상의 깊이나 방향을 분석해 사건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고 흠흠신서에서 밝혔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때 반대파는 계속 정약용을 계속 헐뜯었다. 그래서 정조는 정약용을 보호하기 휘해 황해도 곡산 부사로 내려 보냈다가 기회를 봐서 불러올릴 생각을 하였다. 정약용도 임금의 마음을 잘 알기에 아무 말 없이 곡산부사로 떠나는데 이때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이었고 곡산은 황해도 동북쪽에 있는 산골 이었다. 이곳은 산골이라 원래 가난하게 살고 있기도 하지만 부사들이 더 좋은 자리로 떠날 생각만 하고 나라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백성들이 더욱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한 다산은 부임한 날부터 고을 구석구석을 살펴 잘 다스렸다.
이때 먼저 번에 사또에게 행패를 부린 죄로 한 사람이 포졸에게 끌려왔는데 그는 이계심이라는 사람으로 그동안 백성들이 당한 억울한 일을 일일이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종이에 써 왔다. 정약용은 이계심이 품속에서 꺼내 준 두루마리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곡산백성을 괴롭히는 열 가지 옳지 못한 점'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정약용은 이계심을 풀어주고 글에 쓰여 있는 내용을 뒷조사해 보니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동안 곡산 현감을 지낸 사람들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성들로 부터 세금으로 베를 거둘 때는 긴 자를 썼으며 정부에 바칠 때는 짧은 자를 써서 남은 베는 전임 사또가 맘대로 써 버렸으며 죽은 사람을 산 사람인 것처럼 서류를 꾸몄거나 어린아이의 나이를 올려 장정으로 만들고 노인의 나이를 줄여서 부역을 시켰던 것이다. 부역에 나갈 수 없으면 돈이나 쌀로 대신해 세금을 물렸던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의 생활은 세금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고, 현감과 관찰사에 대한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토지에 대한 세금도 많았는데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산도 장부에는 농토로 되어있어 세금을 내야 했으며, 모든 일이 백성을 위하기보다 자기들 잇속에 따라 법을 만들었다. 그것을 본 정약용은 모든 아전들에게 단단히 명령하였다. 베를 거둘 때나 바칠 때 모두 똑같은 자를 쓰게 하였으며 다른 애매한 일도 백성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결하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