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공민왕 시대에 태어나 최영 장군의 손녀와 결혼한 맹사성은 조선 초기에 많은 벼슬을 거쳐 세종 임금 때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냈다. 맹사성은 또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박연과 함께 조선 초기의 음악을 정리하기도 했고 또한 관직에 있을 때 황희 정승과 함께 청백리로도 유명하다.
맹사성이 젊은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하여 처음 지방군수가 되었을 때 맹사성은 자만심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그가 그 고을의 무명 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내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명 선사가 대답했다. “그건 어렵지 않지요.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런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먼 길을 온 내게 해 줄 말이 고작 그것뿐이오?” 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무명 선사가 녹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는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스님은 찻물이 넘치도록 그의 찻잔에 자꾸만 차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찻잔이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졌고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만 낮은 문틀위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너무 아파서 잠깐 서서 머리를 만지고 있을 때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맹사성은 더 황급히 나갔다. 아마 맹사성은 이 무명스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살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박사, 석사, 학사 등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 천지에 퍼져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이 남을 앞지르는 석차 위주의 교육만 이루어져 자신뿐이 모르는 이기심만 극대로 키운 느낌이다. 인성교육 토대 위에 지식이 주입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느낌이다.
많이 배울수록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지혜를 배워야 하고 아울러 남을 배려하고 베푸는 것이 기쁨 중에 기쁨임을 가르쳤어야 하는데 우리 교육자들도 이러한 교육에 소홀히 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우리나라 교육 공무원인 선생님들이 62세 정년퇴임 때까지 약 40년 가까이 근무한 퇴직금이 일시불로 타면 3억 원쯤 된다.
그런데 언론에 비친 어떤 고위공직자는 몇 개월 만에 7억 원을 벌었다고 떠들 썩 했는데 본인은 법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했다. 청문회에 나오는 고위 공직자들의 모습을 보면 재물을 모은 이야기만 나오지 모은 재물 중 이웃돕기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듣지를 못했다.
국민들 중에는 생활이 어려운데도 쪼개어 불우이웃을 돕기도 한다. 짧은 기간에 쉽게 벌은 7억 원 중 절반이나 아니면 ⅓ 이라도 불우한 이웃을 위해 봉사나 기부를 했다면 무사히 좋게 넘어갔을 것이다. 국민들은 상식이 좋은 법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에 제1편에서 제4편까지는 부임(赴任)·에서 애민(愛民)까지 목민관(지방수령)의 자세를 다루고 있다. 목민관의 선임의 중요성, 지방수령은 근민(近民)의 직으로서 그 임무가 중요하다. 언제나 청렴·절검을 생활신조로 명예와 재리(財利)를 탐내지 말고, 뇌물을 절대 받지 말며, 국민에 대한 봉사정신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고위 공직자들도 목민심서를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눈으로 읽었을 것이다. 앞으로 고위 공직자가 되려면 황희, 맹사성 등의 청백리 이야기와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다시 읽고 공부하여 가슴에 새기도록 국민 모두가 방과 후 과외 선생님이 되어줄 것을 당부해본다.
박문영 / 서울교육연수원 강사, 포천신문 자문위원, 고려대사범대연수원 강사, 전 서울 개원중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