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 마현리(현재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 정제원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집에서 처음 부른 이름은 귀농이었는데 이는 부친이 벼슬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와 낳은 아들이라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성장하여 정약용의 호는 다산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마현리가 어린 귀농(정약용)의 마음을 가꾸어준 고향이었다.
귀농이 자란 마현리 마을 앞에는 큰 강이 흘렀는데 이 강이 바로 한강이었다. 마을의 동쪽에 있었던 양수리는 남한강과 북한강 물이 합쳐지고 이 합쳐진 물줄기는 마재 마을을 감싸고 휘돌아 서쪽에 있는 팔당을 거쳐 한양으로 흘러갔다. 강은 매우 컸으며, 넓은 모래밭과 긴 강줄기가 마을과 산을 휘돌아 흘러갔다.
귀농은 늘 강가에 나가 개구쟁이 친구들과 함께 놀았고 흘러드는 작은 개울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고 고기도 잡았으며 달리기와 씨름도 하였다. 또한 비석치기를 하거나 탑을 쌓기도 하며 놀았지만 귀농은 그 속에서 놀지만 않고 형들이 아버지로부터 글공부 배우는 것을 보고 샘이 나서 어깨 너머로 따라서 배우고는 했다.
어린 귀농은 서툴지만 붓을 들고 글자 쓰는 것도 흉내 내었다. 그가 글씨 연습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큰형인 약현 둘째형 약전 셋째형 약종과 함께 약용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늘 엄하게 공부한 귀농은 일골 살이 되자 제법 한문으로 시를 지을 수 있었다. 철이 들어 차츰 책을 가까이 하며 노는 것보다 집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 때에 아버지는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는데 경기도 연천 현감으로 부임 받아 식구들과 함께 부임지로 떠나가게 되었다. 강에서 모래 장난을 하던 정약용은 아버지가 손님들과 시회를 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집으로 달려오게 되는데 정약용은 금방 어른들이 시를 짓고 있던 벼루 가장자리에 둔 붓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선비가 그의 모습이 가상하여 약용에게 우리들도 시회를 열고 있었으니 여기서 시한 수 지어보라 하고 말하니 그는 서슴없이 종이를 끌어당기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가 이러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小山蔽大山), 거리의 멀고 가까운 이치로다(遠近地不同).” 이 시를 지은 것이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였는데 보고 있던 모두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그날부터 정약용은 더욱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때로는 마을 앞 강가에 나가 자기가 읽은 글을 큰 소리로 외워 보기도 하였다.
정약용이 아홉 살 되던 해 가을 병석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해 아버지는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가족은 다시 마재로 돌아왔다. 정약용은 어머니 생각이 날 때면 말없이 시를 지었는데 열 살이 되자 꽤 많은 시가 모였다.
아버지께서 약용이 지은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을 만들어 이름을 지으려 하였다. 큰 아들 약현이 '삼미집'이라고 하자고 하였다. 약용은 천연두를 앓아 눈썹이 몇 개 없는 것처럼 보여, 눈썹이 세 개밖에 없다는 뜻으로 '삼미'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미집'을 읽어 본 사람들은 조선에도 중국의 두보나 이태백만큼 훌륭한 시인이 나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책읽기를 좋아하던 정약용은 외할머니 댁으로 책을 빌리러 다녔다. 외가는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이며 시인이었던 윤선도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책이 많았다. 어느 날 정약용은 읽은 책을 나귀 등에 싣고 외가에 돌려주러 가는 길에 포천에 사는 이서구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서구는 당시 시에 능했던 이덕무·유득공·박제가와 함께 4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 강산(薑山) 소완정으로 벼슬은 사관을 거쳐 호조 판서, 대제학, 우의정에 이르렀던 대학자였다.
며칠 전에도 책을 나귀에 싣고 갔는데, 책을 좋아하는 것을 보니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이서구가 정약용을 불렀다. 이서구는 책 몇 권을 빼서 내용을 이것저것 물어 보았는데 정약용은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결혼을 일찍 하는 옛날 풍습대로 정약용은 열다섯 살에 장가를 갔다. 부인은 승지 홍화보의 딸이었으며 예의바르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정약용이 장가가던 해에 52년간 나라를 다스리던 영조 임금이 돌아가시고 정조임금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정조가 즉위한 뒤 가장 큰 활약을 하게 된 인물이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 이었다.
정약용은 정치와 경제의 부조리를 타파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서 조선후기의 ‘르네상스 시대’를 활짝 열은 일등공신이다. 정약용은 정조의 ‘영재육성프로젝트’로 탄생한 인물이다. 정조는 즉위한 즉시 왕립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규장각’을 만들고 37세 이하의 관료를 뽑아 3년 동안 규장각에서 공부를 시키는 ‘초계문신제도’를 운영했다.
정약용은 1789년 치러진 식년시에 급제해 바로 초계문신에 뽑혔다. 정약용은 초계문신으로 선발된 첫 해 규장각에서 본 시험에서 5번이나 장원을 차지했다. 초계문신은 당파에 상관없이 실력으로 선발됐고, 매달 두 번씩 치르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면 방출됐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정에 ‘정조의 사람’을 키워 중용 하려던 정조의 계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