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이방원이 두 차례의 난을 일으켜 혈육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아들 방원에게 실망하여 고향인 함흥으로 가버렸다. 이에 태종은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에게 여러 차례 문안사를 파견하여 환궁을 권유했으나, 태조는 이를 거부하고 사신으로 오는 자를 모두 죽여 버렸다고 조선후기 야사의 결정판이라 하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서 그런지 실록에는 태조가 사신을 죽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찌되었거나 차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세간에 퍼지면서 함흥차사(咸興差使)는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특히 우리지역은 태조 이성계와 함흥차사로 가서 살아 돌아온 성석린에 대한 흔적이 존재하여 반가운 이야기로 다가오기도 한다. “명신록”에 의하면 태종 이방원은 문안사를 자원한 성석린을 함흥으로 보내는데 백마를 타고 베옷 차림으로 과객같이 하고 목적지 근처에 당도한 성석린은 태조에게 직접 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시늉을 하였다. 그랬더니 태조가 내시를 시켜 보게 하였고 석린이 “용무가 있어 지나가다가 날이 저물어 말을 매고 유숙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태조는 유난히도 오래 아끼던 그를 불렀고 성석린이 밤중에 부자 사이의 변고에 대한 도리를 말하자 태조는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해서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냐?”라고 의심스런 표정으로 물어 보았고 이에 대해 성석린은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臣)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믿은 태조는 환궁하지만 뒷날 성석린의 자손들이 모두 눈이 멀었다고 하고 둘째 아들은 자식이 없었다고 여러 문헌에 전한다. 그래서 누구나 함부로 거짓으로 말하기를 조심하라는 이른바 “말이 씨가 된다”는 경우로 언행을 삼가라는 교훈을 담고 있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민의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의 입에서는 너나없이 국가와 광역자치단체 그리고 우리지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이 필요하다며 역점시책으로 신도시개발과 전철유치사업, 미군공여지 주변지역 지원특별법 시행과 관련한 60년간의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도록 종합개발계획수립을 점검하여 당면한 사항을 차질 없이 추진되게 하겠다고 주장했다. 또한 쾌적한 주거공간마련과 교육문제 그리고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교통문제와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내세웠다.
그리고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수도권 정비계획법상 성장관리지역이며 대부분이 군사시설보호구역, 상수도보호구역, 토지거래허가구역 등으로 이중 삼중의 규제를 받고 있어 우리지역발전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는 각종 규제들을 해결하겠노라고 입에 침을 튀며 모든 일을 다 이룰 것 같이 대단하게 말잔치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뽑힌 사람들은 전철 7호선 연장, 수도권대심도 철도연장(GTX), 사격장 피해로 인한 보상 차원의 사업유치와 국도 확포장 사업 등의 청사진을 내걸었지만 어느 것 하나 불러도 대답 없는 말 그대로 함흥차사가 되어 버린 현실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대표를 자원해서 나섰을 때 유권자가 선택해 준 이유는 아마도 풀리지 않는 일을 반드시 해결하라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뽑힌 사람들은 온몸을 불사르는 투지를 발휘하여 일을 해결하려는 몸부림도 쳐보고 그렇게 해도 변화가 없으면 떼라도 써서 작은 것 하나라도 긍정적으로 진전된 결과를 얻어내야 앞에 나선 낯이 서지 않겠는가 말이다.
왕방산과 소요산 자락에 깃든 태조 이성계의 정신과 비록 일부 거짓을 말하여 자신이 화를 입기는 했지만 가장 어려운 갈등을 해소하고 살아 돌아온 함흥차사 독곡(獨谷) 성석린 선생이 말년을 포천에서 보내서인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남다르다.
그러니 누구든지 진정으로 시민을 위해 나설 기회가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온몸으로 그 고난을 극복하고 반드시 일을 이루고자 하는 투지와 끈기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금년부터는 능력 있는 리더들이 부지런히 일하여 미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앞당겨 이루어 내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