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란 사전적으로 보면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정의한 대로 보면 하나의 전달 수단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듯하다. 그러나 그러기만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홍시’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마다 ‘홍시’에 대한 느낌이 다를 것이다. 필자는 ‘홍시’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어린 시절에 마땅한 먹거리가 없었던 시절 늦가을에 이모님 댁에 가면 누님께서 둥근 대바구니 옷장 속에 넣어두신 어른 주먹만한 ‘홍시’를 꺼내주시곤 하셨다.
달콤한 ‘홍시’의 맛도 맛이려니와 누님의 달콤하고 따뜻한 사랑이 마치 어머니의 사랑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어린 시절부터 지울 수가 없다. 또한 어떤 이는 모 가수가 불러 인기를 모았던 노래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언어란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다양한 체험이 함께한다면 그 뜻은 정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넓은 의미로까지 확장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언어를 ‘감각언어’라고 한다. 이렇게 된다면 가히 언어는 마법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즈음 장안의 화제를 독차지하고 있는 뮤지컬 ‘친정엄마’를 관람했다. 뮤지컬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뉘앙스는 그 대상이 여성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남성에게도 귀한 아내를 희생적으로 키워 아낌없이 보내 주신 감사한 분으로 인식되어 멀리할 수 없는 감사한 분으로 느껴진다.
성장해 가는 딸을 보면서 ‘친정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희생정신의 고귀함을 깨달아가는 딸의 모습은 진정 이 시대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극단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순탄하지 않은 결혼생활 속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친정엄마’ 밖에 없다. 가정의 대소사에서 음식장만, 기타 사사로운 일에까지 모두 ‘친정엄마’의 몫이다.
이렇듯 딸에 대한 희생적인 헌신의 결과는 병밖에 없다. 그러나 그 병까지도 감추면서 아무렇지 않다고 태연해 하시는 ‘친정엄마’의 희생. ‘친정엄마’의 희생의 끝은 어드멘가! 사랑의 종류도 많지만 ‘친정엄마’의 사랑을 덮을 사랑이 이 세상에 또 있단 말인가!
뮤지컬이 진행되는 동안 간간이 들려주는 동요 ‘섬집아기’는 또한 뮤지컬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주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뮤지컬이 끝나고 돌아가는 관람객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눈두덩이 불그레하고 눈이 아직도 촉촉이 젖어있었다.
어떤 분은 너무 얼어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사실 어려운 세상 살에서 받은 다양한 스트레스를 어디에 가서 해소할 수 있겠는가! 잠재되어 있는 스트레스는 반드시 제 몫을 한다. 스트레스의 결과를 스트레인이라고 한다. 스트레인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달리 표출되는데 반드시 병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레스는 반드시 크건 작건 간에 빨리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마땅히 스트레스를 해소할 기회와 장소가 많지 않다. 모처럼 관람한 ‘친정엄마’는 후련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기폭제가 되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널(딸)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도 널 낳았다는 것이다”라는 ‘친정엄마’의 독백이 딸의 뇌리를 감돌 때 눈물범벅이 되어 통곡하는 딸의 모습은 진정 영혼을 맑게 해 주는 청량제였다.
교육현장에서도 우리 어린이들이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도록 정서적인 청량제를 많이 부여해 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함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