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전에 이해조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있는 홍을표씨는 포천신문에 ‘이해조와 자유종’이라는 제하에 글을 5회간 연재한 적이 있다. 이 글들은 홍을표씨 자신의 주장을 거증하기 위하여 있지도 않은 역사적 사실을 사실인 것처럼 적시했을 뿐 아니라 사실들에 대한 견강부회적 해석이 심한 글이었다.
필자는 굳이 문제를 지적하여 신경 쓰이는 논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고 또 그만큼 한가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러고만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해조에 대한 심대한 인식의 논리적 오류를 가진 홍을표씨가 계속 이해조 관련 행사를 벌이면서 필자에게도 기념사업회 명의의 사업 전단지나 책자들을 계속 보내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이해조 기념사업회의 성격이나 사업들에 대하여 포천시민이나 유관기관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해야겠다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홍을표씨가 쓴 글들의 중대한 오류들을 지적하여 그가 이끄는 이해조 기념사업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우선 크게 문제 삼는 대목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홍을표씨는 자신의 글에서 이해조를 신소설 최고의 작가로 부각시키려고 있지도 않았던 이인직과 이해조의 대립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해조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를 ‘자유종’ 한 가지에 거의 집중시키고 있는 바 이는 편향된 시각이라는 것이다.
우선 홍을표씨가 노정한 첫번째 문제의 경우는 굳이 포용적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해조와 이인직을 비교하여 이해조의 문학사적 가치를 더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자유종의 발표시기를 1908년으로 상정해야만 같은 해에 발표한 이인직의 은세계와의 대결이 뚜렷해지고’(8월21일자 1회분)로 시작한 글이 급기야 ‘이인직에 이용당한 모멸감과 배신감까지 겹친 상황’이 자유종의 출간을 압박했다는 주장으로(9월3일자 2회분)까지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종의 출간 배경으로 여태까지 어떤 논문에서도 제기된 바 없는, 그야말로 소설적 주장이다. 이해조와 이인직이 같은 단체에 몸담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이들이 노선의 차이 때문에 서로를 라이벌로 인식하고 대립 갈등했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가 지난 뒤 결과적 평가를 위해 이인직과 이해조를 대비 검토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이렇게 자의적으로 들이대는 것은 지식과 학문을 다루는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진실 왜곡은 특히 1908년 초에 발표된 ‘자유종’과 맞대결시키느라고, ‘은세계’가 1908년 11월경 단행본으로 처음 독자들에게 선보인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데도 이 작품이 1908년 초반에 ‘신문에 연재되었을 가능성’(9월27일자 4회분)까지를 제기하여 두 작품을 맞대결시키는 데 이르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증거 되지도 않은 역사적 사실을 가상으로 제기하여 두 사람을 맞대결시키려고 하는 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아니 소설도 엄정한 역사소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엄정한 사실과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학술적 담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홍을표씨의 의도처럼 이해조와 이인직을 그렇게 대립시켜야만 이해조의 가치가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인직도 문학사에서는 그의 사실적 표현기법, 당대의 부패한 위정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안목 등에서는 문학연구자들의 적극적 평가를 얻고 있는 인물이다. 단지 그는 당대의 지식인계를 휩쓴 진화론적 사관을 받아들이면서 문명개화에 필요한 세력이 일본이라고 잘못 판단한 것이 그의 치명적 오류였다. 이는 ‘은세계’에 등장하는 최병도나 김정수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추종세력인 데서도 입증된다.
또한 무엇보다 우리가 친일파를 비판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를 반성하자는 의도가 더 크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광수나 최남선의 친일행적을 비판만 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만약 그들처럼 일제의 협박을 받는 처지였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하는 역지사지의 입장에 서서 우리는 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는 의미가 더 커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흑백논리적이고 이분법적인 논리 위에 서서 이인직은 친일을 했고 이해조는 그렇지 않으니 더 훌륭하다는 평가는 자아의 동일성에만 집착하여 타자를 배제하는 근대적 주체론자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홍을표씨의 두 번째 문제, 즉 ‘자유종’에 이해조의 모든 의미가 집약되어 있다는 듯한 태도―‘자유종 하나만으로도 그는 신소설 최고의 작가’(1회)라는 주장은 이해조의 전모를 가리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우선 자유종과 같은 토론소설이면서 정치소설이라 일컬어지는 작품들은 그 외에도 더 있다.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 ‘거부오해’, ‘금수회의록’ 등이 당대를 풍자 비판한 계몽소설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담론의 역사적 예각성에 있어서는 이른바 역사전 기류라 일컬어지는 장르도 있어 이해조의 자유종만이 당대의 빼어난 애국계몽소설이라 내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이해조의 문학사적 가치는 그가 발표한 수십 편의 다른 신소설들과 함께 거론되어야 한다. 그는 이 소설들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경우도 있고 통속성에 매몰된 작품을 써내기도 했던 것이다. 이해조의 성취와 한계를 꼼꼼히 인식하지도 않은 채로 ‘자유종 100년 기념 세미나’, ‘이해조 문학백일장’ 등을 치러나가는 홍을표씨의 담대한 처사가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