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풍요를 가져다준 가을도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이 지나 겨울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다. 아직 들녘에는 올해의 농사를 마무리 짓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만 가을의 막바지라서 그런지 추수를 끝낸 들녘은 한가롭다 못해 쓸쓸 해보이고 하늘거리던 코스모스도 점차 생기를 잃어 가고 있다.
매년 10월 28일은 필자의 결혼기념일이며 올해는 필자가 결혼한 지 28년 되는 날이다. 필자는 28년 전 의정부 서림 예식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조촐한 결혼식을 가졌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할 당시 아내는 무척 예뻤고 우리가 결혼하기까지는 6년 동안 연애를 했다.
연애한지 7년이 되는 해에 우리는 결혼을 했고 아내와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한 날짜가 10월 28일이다. 그 때문에 친구들에게 부러움도 많이 샀고 놀림도 많이 받았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필자에게 매년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은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 된다. 슬하에 아들 하나두고 졸수(卒壽)를 바라보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아내는 지금껏 나와 결혼하고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았고 지금도 고생을 하며 살고 있다.
형제는 7남매나 된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고생하시다가 7남매와 젊으신 어머님만 남겨두시고 일찍 돌아가셨다. 그래서 동생들은 내가 결혼할 때까지도 나이가 무척 어렸고 철부지들이었다.
그랬던 철부지들을 아내가 거둬주고 공부를 시켜서 지금은 모두 출가해 잘들 살고 있다. ‘28주년 결혼기념일’은 그 어느 해보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든다.
어린 동생들 뒷바라지하고 한숨 돌리는가 했는데 지금은 졸수(卒壽)를 바라보시는 어머님을 섬기느라 정작 자신은 아파도 아파할 여유도 없이 보상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아 애처롭고 가엾게 느껴진다. 지금껏 살면서 경제적으로 남들보다 여유로운 삶을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내에게 풍족하게 해준 것도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다. 다음 생에 우리 또 만나면 부부로 만날 수 있겠냐고. 아내의 대답은 피식 웃는 게 전부다.
올 가을도 가고 있다. 명성산 자락에 푸르던 잎들도 낙엽으로 변해 하나둘 떨어지고 정상에 갈대와 억새풀도 계곡의 찬바람이 두려운 듯 잔뜩 움츠려 들기 시작하고 계곡 바위에 부딪치는 물소리만이 가을의 정취를 더 해줄 뿐이다.
내가 지금껏 혈기를 앞세워 살아왔다면 나의 아내는 무엇으로 살았을까. 아마 일일이 말은 하지 않아도 아마 가슴에는 멍에 드리운 시간들이 많았으리라. 어느새 아내의 이마에도 깊숙한 주름이 자리한다.
나와 내형제들에게 희생과 사랑을 영위했던 푸름은 어디로 가고 없는지 잠자리에 들어 깊고 푹 파인 아내의 얼굴에 주름을 보고 있자니 화도 나고 미안한 마음에 어두움 많이 소리 없이 젖어든다.
어디에 숨었는지 찾을 수 있다면 찾아주고 싶은 아내의 시간과 펴주고 싶은 잔주름을 궁핍하게 찾아보지만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돌아온 길이 너무나 멀어 다시 찾아 줄 수 없음에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여보, 사랑하오.’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단 하루지만 당신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주리다. 2010년 10월에 언제나 군상으로 당신의 품에 남고 싶은 남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