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조는 ‘자유종’에서 근대적 국민을 창출하는 방법으로 교육과 종교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를 봉건적인 계급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일종의 국민통합 원리로 보고 기독교를 모델로 하여 유교를 공자교(孔子敎)로 개혁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일종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바라고 있다. “저 무식한 자들이 교육과 종교는 버리고 제사만 위중한다 한들 성현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시리까. 종교에야 어찌 귀천과 남녀가 다르겠소. 지금이라도 종교를 위하려면 성현경전을 알아보기 쉽도록 국문으로 번역하여 거리거리 연설하고…”라는 ‘자유종’의 대목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민족운동은 종교 운동적 전환이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는데, 손병희는 진보회 운동이 좌절한 후 1906년 천도교를 창립하였고,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활약했던 나철은 1909년 대종교를 창시하였고, 박은식, 장지연은 (중국의 강유위의 공교회의 영향을 받아서) 1909년 대동교를 창립하였다. ‘자유종’의 뒷부분이 전통 몽유록과 흥미있는 관련을 보여주면서 유토피아적 지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음은 이런 사실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진 애국계몽기 시기에 근대적 국민의 창출을 통해서 ‘어떻게 나라의 독립을 회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집중 모색하면서, 대중 속에 광범한 전파력과 감화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신소설을 통해 그러한 교육 및 종교 사상을 전파하려 했다.
이러한 이해조의 애국계몽문학은 당시 애국으로 위장된 매국 책동을 벌인 이인직의 친일문학과 비교할 때 그 의의가 드러난다. 이해조의 ‘자유종’과 이인직의 ‘은세계’는 각각 전자와 후자를 대표하고 있다. ‘자유종’은 그 둘의 차별성과 대립성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어, 이해조는 ‘자유종’ 하나로도 신소설 최고의 작가라 할 것이다.
당시 이인직의 ‘은세계’는 소설과 연극 양면에서 그야말로 우리 문학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은세계’가 집필되기 직전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8월 1일 군대해산이 되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게 되면서 1907년 후반기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일제의 거점이 농촌지역에서의 의병전쟁의 확대로 인해 점차 고립되어 가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은세계’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이인직이 소설 형식을 빌어 의병들을 선유(宣諭)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병전쟁의 절정기에 한일합방의 숨은 주역에 의해 집필된 이 소설은 초기 연구자들에 의해서는 개화기 최대의 정치소설로 평가받았고 최근의 연구자들에 의해서는 ‘매국적 책동을 합리화’하는 매판문학으로 비판받고 있다.
‘자유종’과의 대비와 관련하여 우선 거론되는 것은 이인직 스스로도 광고했듯이 ‘은세계’도 정치소설이라는 점이다. ‘자유종’의 정치성은 당대 최대의 계몽운동가의 민족위기에 대한 대중적 계몽교과서로 표현될 수 있다. 또한 이해조가 이인직의 개화론의 친일적 허구성을 의식하고 이에 긴박하게 대응하여 자주독립의 희원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동원하기 위함이었다. 둘 다 정치적 목적을 지녔지만 내용은 상호 경쟁적이고 대립적이다.
우선 ‘자유종’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은세계’의 발표 시기도 예사롭지 않다. ‘자유종’의 발표 시기를 융희2년(1908년) 초반으로 잡고, ‘은세계’도 1908년 11월 단행본으로 출간되기 전에 신문에 연재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 대략 1908년도 초반 자신이 사장으로 있는 대한신문에 연재되었을 것이므로 ‘자유종’의 발표 시기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애국계몽기의 양대 신소설작가의 정치소설은 이렇게 시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시키기 위해 융희2년의 초두부터 격돌하게 된다.
‘자유종’은 실제 신문에 연재된 지 2년 후인 1910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출판사와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은세계’는 1908년 초에 신문에 연재되어 적어도 6월 이전에 완성되고 그 해 11월 15일에 공연되고 5일 후인 11월 20일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을 볼 때, 출판사와 독자의 호응을 얻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책의 광고와 연극 공연의 성공은 상호 상승 효과를 유발하여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이것은 언론인이 주축이 된 개화기의 연극 개량론자들이 대안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은세계’ 공연은 당대 관객들에게 새로운 연극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일만이 개화기의 현실을 해결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이인직의 정치적 소신이 그를 신소설 및 신연극 등의 문화운동의 장으로 이끌었으나, 일본의 한국 병탄이 성공하면서 친일적 정치 문화운동의 필요성이 상실되었을 때 문화운동의 장에 더 이상 그가 머물 공간은 사라지고 말았다.(5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