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우리 동네는 집터 가까이에 있는 작은 화단에, 그리고 좁은 마당, 심지어 옥상에 조차 무언가가 빽빽이 심어져있다. 주로 고추나 상추, 토마토 같은 소소하게 따먹을 수 있는 채소들이 많지만 그 중에 해마다 자신의 계절이 되면 피어나는 여러해살이풀들도 심어져 있어 반가운 경우가 간혹 있다. 붓꽃, 원추리 등이 피어나더니 이번에는 연분홍의 상사화가 피어났다.
잎과 꽃이 평생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그리워하면서 지낸다는 애틋한 사연의 주인공, 상사화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짠한 그리움이 남는다.
수선화과의 상사화는 봄에 수선화를 닮은, 끝이 둥근 선형의 잎이 나와 봄에 열심히 광합성을 해서 구근에 양분을 저장한다. 6-7월이 되면 잎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는 8월경 꽃대가 나와 그 끝에 4-8개의 큼지막한 꽃이 늦여름과 초가을의 계절을 타고 피어난다. 그래서 잎과 꽃은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꽃은 원추리나 나리종류는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아래쪽의 꽃잎이 더 많이 벌어져 그 사이에 수술과 암술이 멋들어지게 달린다. 꽃은 이토록 예쁘게 피어나지만 열매는 맺지 못한다.
상사화는 오래 전에 들어와 흔히 우리 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중국이 고향이다. 흔히 상사화가 자라는 곳이면 옛 사찰터거나 집터인 경우가 많아, 주거지 지표식물이기도 하다. 상사화가 질 무렵, 같은 집안의 꽃, 진한 주황빛의 석산(꽃무릇)이 피기 시작하는데 제주의 여미지식물원에 군락으로 피어있는 모습에 반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특산의 상사화종류도 있다. 바로 이름처럼 진노랑으로 피어나는 ‘진노랑상사화’ (L. chinensis var. sinuolata), 백양산에서 처음 발견했다는 주황빛깔 ‘백양꽃’(L. sanguinea var. koreana) 그리고 제주 특산의 꽃 ‘제주상사화’(L. chejuensis)가 있다. 제주상사화는 연한 살구 빛이 도는데 그 빛깔이 참 곱다.(사진은 평강식물원 연못정원에 피어난 ‘제주상사화’ 이다.)
땅속에 있는 구근, 비늘줄기는 약으로 쓴다. 앞서 이야기한 비슷한 종류를 다함께 유사한 증상에 처방하는데 많은 알카로이드가 함유되어 있어서 그냥 먹으면 독이 될 수 있고 잘 쓰면 약이 되는 식물이다. 해독, 가래 제거, 종기, 소아마비와 같이 마비로 인한 통증과 같은 중상에 처방한다. 최근에는 항암제로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거센 태풍이 지나간 후 가을하늘이 참 맑고도 높다. 남부지방 곳곳에 피어있을 상사화 집안의 꽃구경을 떠나고 싶은 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