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속에 절개가 곧으며 진정한 의로움을 몸소 실현한 포천출신의 선비가 있었다. 그분은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대쪽 같은 의로움을 발휘하였다. 대부분의 여느 사람들이 입으로만 충의를 말하고 있을 때, 온몸을 다 바쳐 실천에 옮기신 진정한 선비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을 떠올리며,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정신을 먼저 이어가고 추모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어둠속에서도 옷깃을 여미던 선비의 정신이 무한한 경건함으로 다가온다.
면암 최익현 선생, 그분은 포천 신북면 가채리에서 경주 최씨의 후손으로 태어나 14세에 대학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선생의 문하에서 큰 학문을 배우고,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여러 벼슬을 거친 후 사헌부의 지평(持平)과 장령(掌令)에 오른다. 이때는 면암의 나이 36세로 하늘을 찌르던 대원군의 위세에 맞서 그의 독재를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으니 이른바 ‘무진소(戊辰疏)’였다. 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지 10년째이던 41세에 면암은 또 대원군의 독재를 규탄하는 ‘계유소(癸酉疏)’를 올려 대원군이 끝내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면암선생은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나갔다. 옆에 도끼를 놓고 궐문 앞에 거적을 깔고 꿇어 앉아 상소를 올리는 이른바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疏)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오로지 상소를 가납하지 않으면 도끼로 죽여 달라는 목숨을 건 상소를 올렸지만 조정은 조약을 포기하지도 그를 죽이지도 못하고 머나먼 흑산도로 유배시켜 4년의 세월을 보내게 했다.
고종32년 1895년에 민비학살 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선포되니 면암 선생은 이 단발령에 반대하여 ‘내목은 잘라도 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此髮不可斷 오두가단 차발불가단) 고하며 효경에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 몸과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처음이라", 고 상소하여 우리 의복의 복원과 치욕의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부당함을 역설하며 우리 것을 지키는 일에 결연히 앞장서 실천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은 74세 노구를 이끌고 호남의 제자들을 찾아가 위기에 처한 종사를 구출을 호소하며 팔백여명의 의병군을 모아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1906년 6월 9일에는 태인 곡성 순창을 중심으로 크게 위세를 떨친다. 이때 ‘팔도 사민에게 보내는 포고문’내용은 이러했다.
“변을 만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건만, 토벌을 꾀하는 이가 왜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임금이 없어지면 신하가 어찌 살아가며, 나라가 망하면 백성이 어찌 보전되겠는가? 가마솥의 생선은 머지않아 삶아질 것이며, 불타는 대청 위의 참새는 얼마 안 가 타 죽을 것이다. 결국 죽고야 말건대 어찌 한바탕 싸우지 않겠는가?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죽어서 충의의 넋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
그러나 싸워야할 상대가 조선군 진위대임이 확인하게 되자 조선인끼리 싸울 수는 없다고 하며 어렵게 만들어낸 의병의 해산을 명하고 서울로 압송된다. 그 후 조선통감부는 최익현을 조선 땅에 두고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약식으로 재판하여 대마도(對馬島)로 강제압송(押送)하여 유폐(幽閉)하게 된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 도착하면서부터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너희들의 음식을 먹고 너희들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의(義)가 아니니 지금부터 단식(斷食)하겠다,’라고 하면서 임금의 분발을 촉구하는 직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면암의 정신을 그의 고향인 포천에서는 선양이나 추모하고자 하는 노력이 매우 부족한 것 같다. 오히려 청양, 정읍, 제주도, 흑산도 등의 다른 지역에서 더 그 뜻을 크게 기리고 있으니 어느 사람은 면암 선생의 고향이 포천이 아니라고 주장할 정도로 후손인 우리의 무관심이 너무도 안타깝다.
갈수록 세상은 어렵고 힘든 터널을 지나가는데 사회의 대부분이 시시비비가 명확하지 않고 돈이 양반이요 부유함이 권력이 되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안위보다 충의와 절개를 지켰던 선비인 면암 최익현 선생의 고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면암 최익현을 알리고 선양하는 일에 모두가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 포천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면암의 정신을 이어가는 데 노력해야 하고 더 늦기 전에 역사 속에 변함없이 흐르는 면암의 정신을 되살려 정책으로 이어지게 해야 된다. 그래서 포천은 자존심이 살아있는 충절의 고장임을 지키며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