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해조 문학 연구>(1986)를 통해 동농(東儂) 이해조(李海朝, 1869-1927)를 국초(菊初) 이인직(李人稙, 1862-1917)의 단순한 연장으로 파악한 임화(林和) 이후의 통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 근대문학의 아버지 바꾸기를 시도하였다.
이인직에서 이광수(李光洙)로가 아니라, 이해조에서 염상섭(廉想涉)으로 이어지는 계선을 근대문학의 축으로 삼아야 우리 문학의 족보가 바꾸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과거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친일개화론을 기원으로 하는 서구주의적 근대화론과 애국계몽사상을 남상으로 삼는 동아시아적 탈근대론이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는 점을 상기할 때, 이 쟁점은 아직도 절실히 살아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터이다.
친일개화론과 애국계몽사상, 양자 모두 계몽주의(Enlightenment)다. 알다시피 계몽주의란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짐으로써 주체를 세우고 그 주체들의 자발적 집합으로서 근대국민국가(Nation)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상운동이다.
따라서 친일개화론은 ‘신하의 오성’을 뒤집어쓴 불구의 계몽주의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왜 이해조는 이인직에 비해 과소평가된 것일까? 좀 거칠게 요약한다면 1910년 대한제국의 식민지화 이후 친일개화론과 그 변종들이 우리 사회의 중심담론으로 자리잡아왔기 때문이다.
경쟁하던 두 담론 사이의 비대칭성이 식민지화 이후 역전하면서, 다시 말하면 1910년 이전에는 애국계몽사상파가 다수였고 친일개화파는 소수인 데 반해 그 이후에는 후자가 다수로 바뀌면서, 이인직을 아버지로 하는 우리 근대문학상이 고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지도 위에서 사라진 사건은 정치뿐만 아니라 문학 내지 문화에도 깊은 낙인을 남겼다. 일제는 애국계몽운동과 관련한 일체의 작업들을 탄압함으로써 애국계몽기(1905-10)의 문화에 강하게 드러난 정치성을 소거하였다.
이 외적 강제로부터 1910년대 문화는 통속성이 현저히 강화되었던 것이다. 1913년 일본신파소설의 번안작 <장한몽(長限夢)>의 출현은 그 상징으로서 모자람이 없다. 신파극의 정착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 소설은 ‘돈이냐, 사랑이냐’,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이냐, 의리냐’라는 엉터리 질문으로 식민지 민중을 탈정치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데 근사하게 성공한다. 이 점에서 이광수의 <무정(無情)(1917)이 <장한몽>의 연장이라는 점 또한 시사적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인직은 친일파이고 이해조는 애국자이기 때문에 후자의 문학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민의 자유’와 ‘나라의 독립’을 양축으로 하는 이해조의 애국계몽사상은 <자유종>(1910)과 같은 수준 높은 관념소설의 형태로서만이 아니라 서사의 육체성을 독특하게 획득한 비관념소설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중인 출신 부자 함진해 집안이 무당 금방울과 임지관(地官) 같은 사기꾼들에 의해 여지없이 몰락하는 과정을 통해 서울 중바닥 사람들의 경아리말과 세태를 핍진하게 그려낸 <구마검(驅魔劒)>(1908)은 이미 염상섭과 박태원(朴泰遠)을 선취(先取)한다.
늙은 박참령의 첩 깅릉집의 짧고 격렬한 불륜을 그림으로써 한국소설에 면면한 ‘불구의 삼각관계’로부터 이탈한 <산천초목(山川草木)>(1910), 멕시코 노동이민의 참상을 그린 <월하가인(月下佳人)>(1911), 이른바 동학란을 욕망 실현의 계기로 활용하는 어느 양반 출신 사기꾼의 행적을 생생하게 그림으로써 한국소설사에 이도사라는 탁월한 전형의 성격을 제출한 <화(花)의혈(血)>(1911), 그리고 한명회(韓明澮)를 축으로 세조정변을 도덕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들의 투쟁이란 눈으로 접근함으로써 위인전에 머문 애국계몽기의 역사소설을 한 단계 들어올린 <한씨보응록(韓氏報應錄)>(1918)은 이후 이광수와 김동인(金東仁)으로 이어지는 우리 근대역사소설의 새로운 계기로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해조 문학의 궤적은 신소설의 전진과 붕괴, 그 전체성을 가장 충실히 반영하였으니, 이해조는 신소설과 3.1운동 이후의 신문학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리라는 문학사적 위치가 확연해진다. 요컨대 이해조는 계몽주의시대 최대의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