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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15] 친일단체인 대동사문회에 관여했던 이해조의 행적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0년 07월 08일
↑↑ 이희용 포천시예총 회장, 본지 자문위원
ⓒ (주)포천신문사
필자가 1990년대 초 여름 어느 날 신북면 작은 마을에 외롭게 버려져 있던 작은 비석을 발견했었을 때의 감동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 비석에는 교과서에 이인직과 함께 등장했던 동농 이해조 선생의 고향 마을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글귀는 우리 포천에 대한 사랑이 넘쳤던 청년 문학도인 나에게는 잔잔한 파도를 일며 언젠가 조심스럽지만 자세한 연구가 필요함을 느낀바 있다.

그 후 포천에서 동농 이해조 선생에 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2004년 필자가 포천신문 문화칼럼을 통해 동농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하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는데, 그 노력의 결과로 지난 2005년 1월 11일 여섯 명이 처음으로 발기하여 이해조 문학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당시 필자의 생각은 ‘향수’라는 시를 쓴 정지용 시인이 월북 작가지만 그의 문학성이 고향주민에 의해 추모되고 일반화 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이해조의 공과를 알리고 그의 작품을 이해가 쉽게 풀어서 시민이 공감하게 만든 후 지역에 있는 대진대학교에 연구소를 두고 한용운의 문학과 같이 상설 연구 캠프를 차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때 발표한 취지문의 내용의 일부를 보면 ‘한국의 반만년 역사 속에서 문학작품은 우리민족의 삶과 얼을 간직하고 표현해왔다.…오늘의 한국 문학사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치열한 시대의 변화로 인하여 그 사상과 역사적 의미가 퇴화되어 가거나 그 가치를 검증하지 못해 민족의 기억 속에 사라지고 있는 분이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 속에 동농 이해조님에 관한 작품과 문학정신을 연구하고 토론하여 새로운 반성과 분석 그리고 자료의 검증을 통한 정체성 회복과…이해조문학회를 발기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해조문학회가 출발한지 몇 개월 만에 첫 번째 세미나를 했고 자료를 준비하고 연구하는 데는 대진대 박정근.김성렬 교수가 기초를 다졌고 동농연구로 박사를 취득한 최원식 인하대 교수의 등장도 두 교수의 역할로 이루어졌다. 또한 김영복 당시 포천신문 편집국장의 역할도 있었고 필자는 총괄 업무를 하며 순수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해조 연구는 이제부터가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기념사업회의 활동을 보면 지역 도서관에 관련서적을 전시하고 연극을 통한 사업의 추진과 변명이라는 제목의 강의 등 끼어넣기 식으로 이어가고 있는 현실은 그렇게 떳떳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능력을 발휘하여 역사적 사료를 수집하는 적지 않은 성과를 낸 것에는 일부분 공감하나 처음에 열의를 가지고 함께 출발했던 학문적으로 출중한 실력을 갖춘 지역의 학자들을 버리고 외부에 있는 입맛에 맞는 사람을 선택적으로 영입한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따가운 시선도 있다.

적어도 계몽문학으로서 동농문학의 연구와 현대적인 번역을 하는 사업에는 지역에서 가장 근접한 연구캠프인 대진대의 학자가 대표가 되는 것이 타당한데 구색 맞추기는 그렇게 정직해 보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또한 동농을 기념하는 사업도 지역을 대표하는 덕망 있는 사람의 주도 속에 자발적인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에도 그 대표성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튼 그동안 동농 선생의 많은 업적을 소개한 것은 의미 있는 일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의 오점도 시민에게 열어보여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1986년 10월에 최원식 교수가 쓴 한국근대소설사론 28-29쪽에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은 민족세력의 인사들은 기로에 세웠다.…일제와 타협할 것이냐? 결국 이해조는 타협의 길을 택하여 총독부 어용지 매일신보에 입사한다.…그는 대동사문회에 관여 했다는데 이 단체는 1919년 11월 경무국 정보위원 오오가끼와 중추원 참의 어윤적이 중심이 되어 발기한 친일 유생단체였다. 그는 또한 유도(儒道) 창간호(1921. 2)에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글은 발표한 바, 이 잡지 또한 1920년 1월에 조직된 친일 유생단체 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의 기관지였던 것이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유교경전강구소(儒道經典講求所)에서 발간된 것인데, 그 발(跋)에 25인 편집위원의 명단에 나온다. 이해조 또한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편집위원의 면모를 살펴보면 어윤적을 비롯해서 박이양, 송지헌, 이범철 등 대동사문회 관계자가 많다. 이해조 만년의 행적에 오점을 남겼다.’ 라고 논문에 지적한 것으로 보아 이해조의 친일 행적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상실한 후 정든 고향 산천을 뒤로하고 구국의 일념으로 만주로 상해로 떠나 독립군으로 광복군으로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던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에 우리가 있음을 새겨볼 때 그 시대에 일제와 타협하여 일본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항일 민족유림의 정신을 능멸하는 일에 앞장섰던 동농의 행위에 대한 반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우리고장에도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이 많이 존재하였으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특히 대동사문회는 유림 친일화의 앞잡이인 어윤적이 식민지 통치에 신명을 바쳐 협조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니 이해조의 초창기 활동을 부각하여 민족적인 행위만을 골자로 홍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의 근간을 지키려 했던 항일 애국 유림들을 유린한 동농 이해조의 행적을 더 깊이 성찰 한 뒤에 문학적 가치를 논해야 올바른 연구가 될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처에서 이달의 문화인물로 동농 이해조를 추천하였다가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은 그에 대한 연구가 조심스런 행보를 통한 상세한 연구와 홍보로 이어져 시민의 객관적인 동의를 받을 수 있어야 함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급하게 서둔다고 있던 일이 없어지거나 없던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이수차천(以手遮天)의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피력하는 바이다. 세월이 좀 흐른다고 동농문학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희용 /
포천시 수능시험장 유치추진위원장, 포천시예총회장, 경기도예총 부회장, 한국스카우트 경기북부연맹 감사, 포천시재향군인회 이사, 포천신문 자문위원, 포천의제21 자문위원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0년 07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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