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원정 16강 신화를 일궈낸 허정무 감독과 이청용, 박지성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젯트 엔진들 너무나 자랑스럽다. 지난 6월 26일 밤 11시에 시작된 우루과이와 한판 승부는 현지 교민은 물론 전 국민의 기대와 안타까움 속에 막을 내렸다.
10시 경부터 하늘이 우르릉 거리더니 마당에 죽창을 꽂으며 비가 쏟아졌다. 현지에도 비가 내리는 밤, 선수들은 마지막 투혼으로 전.후반 경기를 마쳤다. <브라질의 아침>처럼 늘 축제의 끝은 허전을 넘어 입에서 쓴 내가 난다. 밤잠을 설친 열광팬들은 잠시 공황상태를 맛볼지도 모른다. 더 높은 도약은 암울한 시대를 걷고 있는 우리들에게 국민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겠지만 미련이란 얼마나 큰 덕목인가.
원정 8강, 4강 신화를 다시 써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는 것은 다시 살아내야 할 의미 있는 세월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루한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은 물론이요 어디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의 시대에 6월 11일에 개막된 월드컵은 삶의 큰 활력이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분간 조절이 잘 되지 않겠지만 그동안 소홀했던 생업으로, 학업으로, 자신의 소임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는 나도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시청 앞 광장 바닥에 앉아 대~한민국!을 외쳤었다. Let,s be가 찍힌 붉은 셔츠를 입고 너무나 많이 모여 겁도 나는 군중들과 여름밤 하늘을 향해 쏟아내던 붉은 정열-대한민국을 외칠 때 개인은 하나하나가 아니며 친구를 넘어 우리는 모두 한 시대를 함께 걷고 있는 동시대인임을 느끼기도 하지만 뭔가 참여하고 있다는 짜릿함까지 느낄 수 있던 시간! 그것은 동지애이며 안으로는 외로운 개인과 답답한 개인을 크게 위무하고 또한 애국혼으로 이어지는 국민적 일탈의 축제다.
올림픽과 함께, 월드컵은 한 나라의 축제가 아니라 세계인의 축제임이 분명하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물론 축구가 태어난 종주의 나라가 있는 남미와 북미 할 것 없이 모두 그렇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열광 양상의 심리를 나는 이렇게 분석한다.
그 원인은 주입식 교육과 획일적인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열린교육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에 불과하고 여전히 외우고 시험 보는 주입식 교육이다. 여전히 대입을 위해 치열하게 학원과 학교를 오갈 뿐이다. 이 주입식 교육으로 20여년 성장하고 난 후 사회에 던져지면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모두 관람 아니면 감상과 수강의 문화다. 나의 실현과 참여가 아니라 어딘가 가서 그림이나 음악을 감상하고 강의를 듣고 본다. 강사나 배우 그리고 자신의 액션을 보여주는 사람은 분명히 자신을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강사가 수천 명 일 수 없고 한 무대에 오르는 배우가 수만 명 일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참여를 통한 실현, 다시 말해 사회 속에 참여하여 내 존재를 알리고 또 그 사실을 의식해야 하는 속성을 지닌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대부분 참여하여 실현하는, 다시 말해 쏟아내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모두 다 집어넣는 프로그램이다.
오로지 있다면, 이 다중의 참여와 실현의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곳이 나이트클럽과 노래방 등, 소비적인 유흥의 장소다. 이런 사회에서 나를 실현하는 것, 내가 직접 배우가 되는 것, 나를 토해내는 프로그램이 성황을 이루기 마련이다.
그래서 올림픽, 김연아, 월드컵은 물론이요 가깝게는 노무현 대통령, 법정 스님 등 추모의 열기도 열기지만 내가 직접 참여하는 실현문화의 한 양상일 수 있다. 학생 데모와 촛불시위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대단위로 결속력을 갖는 것도 이 증상에서 기인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
이렇듯 다중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시급하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청소년 범죄는 증가하고 사회적 병리는 속출할 것이다. 먹었으면 배설이 있어야 한다. 창조적으로 이어지는 배설문화 시급하다. 부패도 문제지만 주입식 교육과 획일적 문화 때문에 우리사회 발작 직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