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새만금 준공에 대해서 모든 매체가 축제의 팡파레를 울리기 위해 신문과 스크린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환경과 생태문제로 논란이 되었던 이슈라서 드디어 마무리되는구나 하고 안도하면서도 무언가 미진한 문제로 자꾸만 뒤가 캥기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방조제로서는 33.9km라는 세계 최장거리를 자랑할 뿐 아니라 투입된 예산규모도 2조9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가 공사의 규모가 얼마나 큰 사업인지 실감나게 한다. 이곳에 글로벌 신경제 거점과 복합문화관광의 메카로 발전시키겠다는 거창한 계획들을 내놓고 있어 경제개발에 있어 소외되었던 호남인들의 가슴을 채워주기에 남는 듯하다.
하지만 그 고장 출신인 필자의 가슴에 슬픔의 밀물이 밀려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부안의 해창부터 시작되는 갯벌은 이 고장출신들에게 귀향의 느낌을 전해주는 출발점이다. 전주나 익산에서 부안으로 갈 때 김제 만경평야를 거치면서 느끼는 광활함도 좋지만 썰물 때 수평선 끝까지 펼쳐져있는 새만금의 갯벌에 황금빛 낙조가 내려쬐는 장경은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혹자는 갯벌을 웅장한 방조제로 막고서 기념비를 세운 모습이 더 장관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는 갯벌과 바닷물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냈던 서정적인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흉물로 보인다면 지나친 것일까.
정부는 방조제 건설로 사라지는 새만금의 갯벌을 두고 환경과 생태의 파괴라고 공격받을 것에 대비해 새만금을 ‘저탄소 녹색성장 선도’나 ‘청정생태의 보고’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새만금이 시화호의 실패의 모델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도 1조 9천억원을 더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만경강이나 동진강으로 흘러드는 왕궁축산단지의 폐수를 철거하고 각종 정화장치를 함으로써 새만금의 오염을 원천적으로 막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지자체 사업에 국비를 사용할 수 없다는 원칙을 염두에 둔다면 과연 이런 계획이 현실화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설사 이런 최첨단의 시설이 갖춰진다 하더라도 갯벌이 지니는 생태적 역할을 무엇이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갯벌은 육지에서 인간의 개발로 파생된 오염물질을 분해하고 정화하는 기능을 한다. 결코 인공적인 정화장치는 갯벌에 의한 자연적인 청정작용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이나 기술로 인해 산업이 발전하지만 그것들은 대량생산을 부추기고 이로 인해 많은 쓰레기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인류는 진보라는 명분으로 자연을 공생의 동반자로 보기보다는 이윤창출을 위한 도구요,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생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상에 존재하는 생물, 무생물들이 동거하는 운명적인 공동체적 공간이요, 하나의 집이다. 이것들은 서로 떨어져있는 파편적 존재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뭉쳐있는 한 몸들의 지체라는 것이다.
시화호에서 이미 우리가 경험한 바와 같이 호수를 담수화하여 인간에게만 편리하게 이용하고자 한 결과 그곳에 서식하던 수백만의 조개와 소라, 게, 굴을 비롯해서 천문학적인 생물들의 죽음을 초해하고 말았다. 정부가 새만금을 녹색 생태공간으로 만들겠다고 천명하고 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갯벌이 없어진 인공적 공간에서 그곳에서 살던 백합조개, 소라와 새우등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공의 호수 위에 배를 띄워 관광객들에게 특별한 재미를 준다한들 갯벌에서 뛰어다니며 꽃게를 쫒아 다니며 깔깔거리던 순진무구한 즐거움은 느낄 수 없으리라. 우리는 사라져버린 갯벌을 그리워하며 도시적 개발의 공간을 휘비고 다니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생태시인 박영근은 <해창에서>란 시에서 사라진 갯벌 앞에서 망연자실하며 이렇게 노래한다.
거기에 늘 어스름 찬바람이 일던 어업조합 창고가 있었다 거기에 칠산바다 참조기 궤짝이 밤새워 전깃불 아래 쌓이던 부둣머리 선창이 있었다 거기에 갯물에 쩔어버린 삭신이 조생이 한 자루로 뻘밭을 밀고 가던 홀몸 조개미 아짐 읍내 닷새장 막차를 기다리던 감나무가 있었고 흉어철이 들수록 밤이면 혼자서 가락이 높던 갈매기집이 있었다 지금은 폐항도 아닌 신작로만 간신히 살아 나를 불러 세우는 마을 바닷속으로 비 이백년 나이를 꺾어버린 팽나무 영당(靈堂)자리에 비 수십킬로 뻘을 질러 간다는 저 방조제 끝이 어딘지를 나는 묻지 않는다 타는듯 붉은 노을이 내려 바다도 집들도 바닷바람을 재우던 애기봉도 온통 환하게 몸속을 열어보이던 그때를 찾아 천천히 걸어들어갈 뿐이다. 빗속으로 물보라 엉키는 바닷가 철책을 지나 갯벌을 건너
박정근 / 대진대 영문과 교수, 본지 칼럼위원장, 윌더니스 주간 (park@daeji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