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 정약용은 사람이 누리는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 이렇게 둘로 나누어 설명했다. 열복은 누구나 원하는 그야말로 화끈한 복이다. 높은 지위에 올라 부귀(富貴)를 누리며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다. 모두가 그 앞에 허리를 굽히고 눈짓 하나에 다들 알아서 긴다. 청복은 그게 아니다. 청복은 욕심 없이 맑고 소박(素朴)하게 한세상을 건너가는 것이다. 가진 것이야 넉넉지 않아도 만족할 줄 아니 부족함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열복을 희구(希求)한다. 남 앞에 떵떵거리며 잘 살기를 원한다. 욕심 때문이다. 자족(自足)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배가 불러도 사냥하기 때문이다. 일반 동물들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는다.
백수의 왕이라 부르는 사자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렇지 않다. 배가 불러도 사냥한다. 거기서 업을 짓는 것이다. 업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이다. 당대는 아니더라도 후대에 반드시 되돌아온다. 그래서 업보(業報)라 하는 것이다.
잘 되어가는 듯 하면서도 어딘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는다. 처음엔 잘 나가다가 항상 중간에 좌절하거나 끝이 안 좋게 되기 때문에 문제 삼는 것이다. 요행이 자신이 열복을 누려도 자식 대까지 가는 경우란 흔치 않다. 열복을 바라기 전에 적선(積善)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하는 이유이고 착한 심성(心性)을 지녀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할줄 아는 지족(知足)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청복을 말하며 그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이유이다.
옛 분들은 ‘족부족(足不足)’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만족하고, 소인은 어이하여 언제나 부복한가. 부족해도 만족하면 남음이 항상 있고, 족한데도 부족타 하면 언제나 부족하네. 넉넉함을 즐긴다면 부족함이 없겠지만, 부족함을 근심하면 언제나 만족할까?..., 부족함과 만족함이 모두 내게 달렸으니, 외물(外物)이 어이 족함과 부족함이 되겠는가. 내 나이 일흔에 궁곡(窮谷)에 누웠자니, 남들이야 부족타 해도 나는야 족하도다.” 족부족이란 만족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다.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만족할 줄 모르면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신기루를 쫓게 된다. 물론 젊은 날엔 희망을 가지고 야망(野望)을 가져야 한다. 꿈이 있어야 한다. 그 꿈을 위해 청춘(靑春)을 불사를 줄도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이 문제다. 꿈을 이루고 나면 뒤를 돌아봐야 한다. 야망을 성취(成就)하고 나면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나로 인해 핍박(逼迫)받은 사람은 없는가? 나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사람은 없는가? 나로 인해 억울해하는 사람은 없는가? 성찰(省察)해야 한다. 그리고 베풀어야 한다. 덕(德)을 쌓아야 한다.
덕이란 베푸는 것이다.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덕이란 이처럼 베푸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덕은 베풀 때 빛나는 것이다. 덕을 쌓으면 열복은 저절로 온다. 칭송(稱頌)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칭송이 자자하기 때문이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란 그래서 생겨난 말이다. 적선을 해야 경사스러운 일이 따르는 법이다. 적선을 해야 화[殃禍]가 도망가는 법이다. 6.25가 말해주지 않는가? 적선을 한 집안은 불타지 않았다. 적선을 한 집안은 화를 당하지 않았다. 지리산 중턱에 있는 적선가(積善家)를 말하는 이유이고 경주의 적선가를 말하는 이유이다.
지리산 중턱에 있는 적선가는 절대로 고기를 굽지 않았다고 한다. 냄새가 울 밖을 넘을까 염려해서이다. 그만큼 남을 배려했던 것이다. 남의 처지를 생각했던 것이다. 경주의 적선가는 백리 안짝에 밥 굶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흉년이 들 때는 절대로 땅을 사지 않았다고 한다. 한[怨恨]을 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청복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적선가를 돌아보면서 다산이 말하는 청복과 열복에 담긴 뜻을 되새겨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