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하면 행사 후의 뒤풀이도 바뀌는 모양이다. 요즘 언론과 방송에 며칠 동안 자주 등장하여 기성세대를 당혹시킨 사건은 중학생들의 알몸 세리모니이다. 졸업식이 끝난 뒤 선배들이 졸업한 후배들을 알몸으로 얼차려를 시키거나 차가운 바닷물에 빠뜨리는 매우 비인간적인 의식절차이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후배들의 교복을 갈기갈기 찢고 밀가루와 케첩을 알몸에 바른 채 뛰게 하는 해괴망측한 모습에 기성세대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다. 경찰은 여론이 매우 비판적으로 돌아가자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을 구분하여 수사한다고 야단이다.
학생들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기성세대들의 고답적인 의식에 대해서 반발하기 마련이다. 그 반항을 잘못 다스리면 소위 문제아로 전락하여서 평생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사실 학생들의 문제는 교육으로 설득하고 순화시켜서 사회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학교의 책무이기도 하다. 물론 육체만 커진 미성숙아들을 잘 이끌어 좀 더 미학적인 축제의 형식을 받아들이도록 해야겠지만 사춘기 학생들의 성장통으로 벌어진 일을 법으로만 다루어서는 안될 일이다.
청소년들은 사회에 순응시키려고만 하는 기성세대에 대해서 일종의 시위적인 게임을 하고 있다. 무언가 그저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무시하려고 하면 그들은 더 과격한 방식을 강구할 것이다. 그들은 어른 만큼 커졌으니 자신들 나름대로의 문화의 몫을 요구하고 문화의 주체로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성공과 생존의 법칙에만 매달리는 기성세대는 청소년의 행위가 유치하고 무의미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성인의 눈높이로만 보아서는 그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작년에 선배들이 옷을 벗겨 찢고 거리를 뛰게 했으니 나도 약간 바꿔서 대물림의 게임을 즐겼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문화가 자기들에게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문화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젊은 피가 약동하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왔는가.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부하라고 강요하고 그 것도 모자라 밤늦게 까지 학원에 잡아두지 않았던가. 학교는 그들이 젊음을 즐기고 신체를 단련시키며 예술을 향유하고 창조하도록 교육을 하지 않는다. 학교가 청소년들의 꿈과 이상을 키워주는 상아탑이 아니라 좋은 대학과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 모든 취미나 여가활동을 포기해야 하는 감옥과 같은 곳이다.
프로이드는 솟구치는 욕망을 억누르기만 하면 그것이 순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폭력화되거나 괴팍해진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의 알몸 세리모니는 법적으로 처벌하는 방식으로 금지한다고 없어질 일이 아니다. 경찰은 처벌이 아니라 선도 위주의 대책으로 ‘솔로몬 해법’을 내놓았다고
발표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몇몇 학생을 기소하고 벌금을 물려서 다수의 학생들에게 경고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젊음의 욕구를 미학적으로 발산할 수 있는 안전밸브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느끼고 있는 슬픔이나 외로움, 그리움이 혼자에게만 부여되는 것이라는 소외감을 느끼며 산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가 없다. 미성숙아들은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애(自己愛)’의 우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몇 시간이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혼자만 대화를 하고 인터넷을 통해 또 다른 나르시시스트와 대화를 즐기지만 현실은 내몰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이 나르시시즘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의 악세서리가 아니고 미래의 주인임을 깨닫게 하고 이 세상은 함께 살아가야할 공동체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리라. 이성부 시인은 “집”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봄볕 골고루 받고 있는 집들이/저 혼자만 가난한 줄 알지만/알고 보니 이웃들 모두 쪼들려있나니./보리고개 속에서/저 혼자만 저 혼자만 슬픔에 빛나는 줄 알지만/알고 보니 모두 다 빛나고 있나니./혼자만 아는 외로움도/혼자만 부딪치는 그리움도/모두 다 같은 외로움,/같은 그리움인 것을,/오손도손 모여 이마를 마주하고 /봄바람도 노놔 가지고,/금가고 허물어진 블로크 담도/서로 함께 다시 우나니/저마다의 분무기로/서로의 마른 마음 적셔주나니.”
풍요의 사회는 인류가 지향하는 낙원의 대체물이지만 그것은 한없는 물질적 소비로서 충족될 수 없다. 청소년들의 우상인 아이돌들을 나체화하여 별별 쇼 프로그램에 등장시키고 상업화하는 기성세대들과 방송매체들이 이제는 알몸 세리모니를 한다고 떠들어대면 이거야말로 앞 다르고 뒤가 다른 위선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문화는 모방에서 시작하기에 뒤따라가는데 명수이다. ‘서정의 시대’는 지났다고 해서 동요와 동화가 주는 맛을 잃어버린 세대들은 비트의 소음만으로 가득 차있다. 누가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책임의 중심에 바로 우리가 서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을 입시지옥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 한 그들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순화되지 못하고 어두운 뒷골목애서 폭발할 수밖에 없는 인화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경찰들의 ‘솔로몬 해법’은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유념해할 것이다.